(중국기행)‘잠자는 호랑이가 서서히 깨어난 상해'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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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잠자는 호랑이가 서서히 깨어난 상해'는 지금..
  • 고현준
  • 승인 2019.10.0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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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흥사단 중국답사)치외법권지역 많았던 상해, 3.1운동 이후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들어

 

(답사 1일차)중국 상해 푸동공항에 내리다
 

 

제주 국제공항에서 중국동방항공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상해 푸동국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비행한 시간은 5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이는 상해상공의 어느 지점에 이르자 푸른 색의 바다와 황토색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드넓은 바다가 눈앞에 들어왔다.

드디어 중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다는 뚜렷하게 구별됐다.

조금 더 날아가 공항이 가까워오자 잘 정돈된 시골의 정경을 엿볼 수 있게 정리된 농촌모습이 우리의 시골풍경처럼 정겹게 나타났다.

제주를 떠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드디어 상해 푸동공항에 무사히 착륙한 것이다.

 

 

 

내리면서 보니 푸동공항은 우리나라 김포공항의 10배 정도는 넓어 보였다.

엄청난 크기의 공항의 규모가 놀라웠다.

제주에 건설하겠다는 활주로 1개의 제2공항 계획은 너무나 소박한 작은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때 들었다.

답사에 나선 한 단원은 상해 푸동공항을 바라보며 “앞으로 제주도의 모든 개발정책은 만약 실패할 경우 그에 대한 모든 배상을 도지사는 물론 이를 기획한 공무원까지 모두 개인이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얘기로 제2공항 등 개발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펼쳐지고 있는 아무런 의미 없는 잘못된 개발에 대한 그 뒷감당을 누가 하느냐"며 "이제부터는 그 책임을 도지사와 공무원에게 물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중국에서의 첫 입국수속은 개인마다 일일이 사진을 찍고 지문을 남기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은 중국땅으로 들어가는 공항에서만 두 번이나 이뤄졌다.

나와서 들어보니 요즘은 중국의 국경일 기간이라 모든 검색이 더욱 강화됐다는 얘기를 전했다.

 

우리 일행은 이후 공항입구로 나와 한참동안이나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의 가이드를 맡았던 이순화 씨는 “지금 중국이 국경일을 앞둔 때라 거리는 만원이고 버스를 빌리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이해를 구했다.

우리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리무진버스를 타고 상해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지난 9월25일부터 29일까지 4박5일간의 중국답사 여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제주흥사단 중국답사팀을 임시정부 관련 답사 예정지인 상해, 소주, 남경, 항주, 상해로 안내하는 코스였다. (우리 답사팀을 안내한 원코리아투어 정윤승 대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안내를 맡아 수고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비약하는 도시 상해는 지금..

 

상해는 중국 장강(長江=양자강) 어귀에 있는 상공업 도시로 정부 직할시이다. 상해항은 강어귀의 외항과 그 상류 약 39km까지의 내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만 톤급의 외항선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세계적인 무역항이다.

중국 최대의 도시이자 손꼽히는 공업도시이며 금융도시이다. 또한 철도, 항공, 해상 교통의 중계․집중지로 국내외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학술과 문화의 도시로 발달하여 대학, 도서관, 연구기관 등이 많다. 춘추시대에는 오나라 땅이었으나 월나라의 영토로 되었다가 초나라로 바뀌었다.

진시황 때 행정개편으로 상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으며, 처음에는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해가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阿片戰爭)의 결과 영국과 맺은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개방된 후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열강들의 조계를 거쳐 외국세력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해의 실권은 외국인에 의해 장악되고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의 근거지가 되었다.

중국 당국의 영향력이 적은 상해의 조계지에는 중국의 혁명가뿐만 아니라 각국의 정치망명자들이 몰려들어 민족해방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949년까지 혁명과 반혁명 세력의 격렬한 대결장이 되기도 했다.

 

 

한편 상해는 3.1운동 이후 망명정부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조직되어 1932년 5월 일본의 탄압을 피해 가흥(嘉興)-항주(杭州)로 옮기기까지 활약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이곳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 점령군 총사령관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등 일본군 수뇌부 다수를 폭사․부상케 한 곳으로, 윤봉길 의사 의거 유적지와 임시정부 청사가 보존되어 있다.

회해중로(淮海中路), 마당로(馬當路)를 중심으로 한 상해 노만구(盧灣區) 일대의 구 프랑스조계 지역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조국해방을 위하여 활동했던 지역으로 1920년 당시 약 1천여 명이 상주했다고 한다.

상해는 국제교통의 요지이며, 각국의 조계지가 설정되어 국제정세 파악에도 용이하여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던 것이다.

상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도, 월남 등 동남아시아 독립운동 지도자들도 모여 들었고, 중국의 사상가도 이곳에서 지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해는 조계지에 따라 세계제국주의의 선봉대가 집결해 있던 곳인 동시에 아시아 민족의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상해는 서양 제국주의의 잔영과 아시아 민족운동의 발자취가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제주흥사단 정리)

 

상해 시내로 들어서면서 처음 놀란 것은 시내를 뒤덮은 거대한 빌딩들의 숲이었다.

여기저기 많은 건물들이 높게 세워져 상해가 경제적으로도 대단한 도시라는 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상해의 면적은 6,330㎢로 서울의 10.5배나 더 크다고 한다,

인구는 3천여만 명으로 이중 199만 여명의 조선족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순화 가이드는 “중국인중 92%는 한족이며 중국에는 모두 55개의 민족이 있지만 모두 소수민족으로 전인구의 8%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중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우리나라 KTX같은 시속 431킬로미터로 달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자기부상열차(CRH고속철)를 자랑스럽게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더욱이 중궈중처(中國中車·CRRC)는 현재 시속 600킬로미터의 자기부상열차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세 아이의 아이이어로 만들어진 남포대교

 

상해시내로 들어올 때 남포대교가 보이자 남포대교의 회전식 도로건설에 대한 비화도 전해 들었다.

남포대교라는 글씨는 등소평이 쓴 글이라는 설명과 함께 “영국인 건축가가 다리건설을 맡았는데 다리가 너무 높아 내려오는 길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던 차에 그의 딸이 자꾸 아빠에게 같이 놀자고 졸랐다”는 것이다.

이 건축가는 “지금 아빠는 이 다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내려오는 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머리가 아프다”며 아이를 달랬다는 것.

그러자 이 아이가 놀라운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거야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오면 되지..”

이 건축가는 대교가 모두 완성된 후 이 이야기를 전하며 딸과의 비화를 전해 ‘남포대교는 5세 아이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다리’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거대한 이 다리를 지나올 때 넓게 회전하며 도로를 내려오는 동안 다리 하나에도 이런 역사가 하나 숨어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만 했다.

깨끗하게 비치된 쓰레기통..담당자는 관리를 잘하고 있었다
거리질서를 안내하는 경고판..교통질서를 위반한 사람의 얼굴이 찍혀 나온다

 

상해의 개발은 중국의 개혁,개방 선포 후 홍콩 앞에 있는 심천부터 시작해 성공했고, 이후 상해의 상징적인 건물인 동방영주타워를 황포강변에 95년에 지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점차 ‘잠자는 호랑이가 서서히 깨어난다’는 뜻으로 영국 조계지 반대편에 10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기 위해 큰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 부두 옆에는 황포공원이 있었는데 이곳은 영국의 조계지로 60년 동안 중국인은 이 공원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리를 개,보수하면서 공원조차 모두 사라져 버려 공원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

상해 중심을 도도히 흐르는 황포강은 폭이 300미터에 이르고, 깊이는 12미터나 된다고 하며 많은 배들이 이 강을 따라 수송을 맡고 있다고 한다,

황포공원이 있었다는 유럽풍 건물이 밀집한 100년 된 거리에서 바라보는 황포강 저편의 강변은 상해의 발전상을 능히 자랑하는 곳으로 이미 명성이 나 있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미어질 정도로 많았다.

우리 답사팀은 이곳에서 20여분을 머무르며 상해를 마음껏 즐겼고, 이어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답사지인 소주로 향했다.

 

 

 

 

(이 기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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