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행3)“눈을 밟고 밤길을 걸어가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상태바
(중국기행3)“눈을 밟고 밤길을 걸어가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 고현준
  • 승인 2019.10.03 1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흥사단 중국답사3)아름다움과 비극이 함께 공존하는 '역사의 도시 남경'
양자강

 

(답사3일차)중국 고대  4대 미인과 그들의 미모를 말하는 별칭

 

서시(西施) 침어(沈魚)

서시(西施, 생몰년 미상)는 춘추 전국 시대 월(越)나라 때의 사람이며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다.

오나라의 왕인 부차를 홀려 오나라를 멸망하게 하였고 오나라가 멸망한 뒤 월나라의 왕인 구천의 후궁이 되지만 구천의 왕비에게 비밀리에 제거되어 죽임을 당한다.

 

서시는 침어(沈魚)라는 별칭으로 불리운다.

 “물고기가 부끄러워서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서시는 시골에서 삼베를 빨며 생활했다고 한다.
얼마나 예뻤는지 서시가 삼베를 씻으러 강가로 나오면 고기들이 그 미모에 반해 헤엄을 치는 것을 잊고 그냥 흘러가 버린다는 얘기에서 침어라는 별칭을 붙였다고 한다.

 

폐월(閉月) 초선(貂蟬)

<삼국지>로 유명한 초선은 용모가 빛나는 달과 같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 화원에서 초선이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자,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라고 하여 폐월(閉月)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하기 위해 미인계를 사용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경성지모(傾城之貌), 경국지색(傾國之色)은 모두 그녀에게서 나온 고사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름다운 중국인 (중국에서 보물찾기, 2004., 곰돌이 co., 강경효)

폐월--“달이 부끄러워서 구름 뒤로 숨어 버리다.”

삼국지에서 양아버지인 왕윤을 위해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시켰던 미인으로 알려진 초선. 초선이 밖으로 나오면 달이 부끄러워 숨어버렸다는 데서 폐월이라는 별칭을 갖는다고 한다.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기러기가 날아가다 떨어지다."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한나라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으로, 한 원제는 북쪽의 흉노를 달래기 위해 그녀를 호한야와 결혼하게 하였다.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그녀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와 비파 소리에 반해 날갯짓을 잊어 땅으로 추락했다.

이에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름다운 중국인 (중국에서 보물찾기, 2004., 곰돌이 co., 강경효)

 

화공에게 잘 못보여 흉노족(지금의 몽골)에게 시집을 갔던 왕소군은 늘 남북으로 오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곤 했는데..기러기들이 하늘을 날다 왕소군을 보면 그 미모에 반해 날개짓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별칭이다.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당나라의 미녀 양귀비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 중에 함수화(미모사)를 건드리게 되었다.

함수화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워하며 바로 잎을 말아 올렸고, 당 현종이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움(수화 : 羞花)'에 찬탄하고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 칭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나라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간신이 제멋대로 날뛰어 당나라의 정치는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양귀비는 나라를 어지럽힌 죄로 안사(安史 : 안록산-사사명)의 난 때 피난길에서 처형당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아름다운 중국인 (중국에서 보물찾기, 2004., 곰돌이 co., 강경효)

 수화--"꽃을 부끄럽게 하다."

당나라 양귀비는 현재의 기준으로는 예쁜 여자가 아니었다지만..당시 꽃밭에 양귀비가 나타나면 그 미모에 부끄러워진 꽃들이 고개를 떨군다고 해서 수화라는 별칭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 이순화 씨는 이같은 중국 4대 미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지금도 미인을 보면 수화같은 미인이라느니 폐월의 미인이라느니 하며 여자들의 미모를 칭찬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중국인이 만든 이야기지만 과연 과장법의 대가들이라고 불리울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화다.

 

난징(남경)의 가로수는 1백년 된 플라타너스나무(양버즘나무)로 가득..

 

우리가 역사와 만나는 것은 그 역사가 주는 지향점을 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만드는 역사가 후세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또 바라봐야 한다는 이유도 있다.


중국의 상해를 도도히 흐르는 대운하의 역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무려 2500년전에 그들이 이 운하를 만들기 시작할 때 8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릴 줄 알았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도시를 만들어갈 줄이야 그때 과연 알기나 했을까..?


중국의 역사와 만나며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늘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았을 뿐이지만, 지금 후세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보물 같은 위대한 전설같은 위업을 만들어 무서운 진실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상해임시정부 청사에서 만난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 옆에 놓인 글귀에도 그런 진실이 놓여 있었다.

踏雪夜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조아행적 수작후인정)休靜/李亮淵

“눈을 밟고 밤길을 걸어가니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이 글귀는 김 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 주석시절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던 좌우명이었다고 하는 서산대사의 시중 하나지만, 지금도 액자에 김구 선쟁의 글씨로 담겨 임시정부 청사안 김구 흉상옆에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우리 답사팀이 남경에 도착해서 이 도시를 걸을 때 가장 놀라운 것은 도시를 뒤덮은 플라타너스 나무였다.


플라타너스라는 나무는 중국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총통은 “남경의 가로수는 모두 플라타너스나무로 심으라”고 지시했고 100년이 지난 지금 남경과 상해에는  플라타너스나무가 모든 도시를 감싸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곳 사람들은 절대로 이 가로수를 자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길도 마음놓고 넓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남경과 상해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도시의 풍경을 아름답다 못해 반할 정도로 그렇게 시민들의 힘으로 푸르른 도시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중국의  4대 고대도시는 서안(장안) 낙양 북경 남경이라고 한다.

4대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남경은 처음에는 손권의 오나라의 수도였고 이후 월나라의 수도로 변했고 남북조시대의 남조 양-송-제때와 태평정부에 이은 장개석의 국민당정부 때의 수도였을 정도로 전쟁의 참화를 많이 겪은 도시라고 한다.

플라타너스 가로수로 가득한 남경이라는 도시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 플라타너스 나무로 인해 그 명성을 자랑한다고 한다.

국민당 시절 당시 수도가 남경이었기 때문에 좋은 품종을 심어서인지 너무나 예쁘게 잘 자라 나 지금은 모든 중국인이 사랑하는 남경이라는 도시의 얼굴이 됐다고 할 정도다.

 

 

남경(南京;난징)

 남경은 장강에 면한 강소성 성도이며, 중국의 역사․문화 도시로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중국의 4대 고도(古都)중 하나로 흔히들 남경을 육조의 고도(古都)라고 하는데,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이 도읍을 정한 이래로 동오(東吳), 동진(東晋), 남북조시대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고도였다.

명나라 초기 주원장(朱元璋)이 처음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가 제2대 황제 때 북경으로 천도해 갔으며, 태평천국의 난 때 남경에 그 수도를 두고 천경(天京)이라 했다.

신해혁명 후인 1912년 손문도 이곳을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수도로 정했으며,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물려나기 전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정부의 수도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되어 일제의 괴뢰정권이었던 왕조명(汪兆銘) 정권이 수립되었다. 특히 1937년에는 남경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자행된 곳으로 약 3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산된다.

소위 남경대학살은 군인들은 물론 민간인, 부녀자, 어린 학생, 심지어 유아까지 처참하게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져 중국이 당한 이민족의 침략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남경의 또 다른 특징은 여름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덥다는 것이다. 무한(武漢), 중경(重慶)과 함께 중국의 3대 더운 지역으로 꼽힐 정도로 여름의 남경은 기온이 40℃까지 올라간다.

겨울에는 때에 따라서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기도 하며 가을은 건조한 편이다. 현재의 도시 윤곽은 명나라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의 성벽은 지금도 남아있다.

 

 

남경에서 공자를 만나다

 

이날 우리 답사팀이 남경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공자를 모시는 사당 부자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 초입에 커다란 공자의 동상이 서 있고 사람들은 공자상의 발과 옷깃을 만지며 복을 빌기도 했다.

부자는 공자를 말한다.
공부자라고 하는 부르는 것은 존경의 표시로 중국인들은  ‘공자는 우리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며 큰 도시에는 모두 이렇게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부자묘 주변에는 옛날 과거시험을 봤던 광장이 있고 장원이라는 글이 써있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 주변에는 옛날 그대로의 상가 등과 함께 현대식 거대한 상가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지역 주변에 있는 오래된 집들은 거의 1-2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도 많았다.
볼거리 먹을 꺼리, 살 꺼리, 볼 꺼리가 가득한 길고 긴 상가를 이루고 있었고 지금도 주변에서는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남경 부자묘(夫子庙)

푸쯔먀오(夫子庙)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보통 공묘(孔庙)라고도 불린다.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의 ‘공부자(孔夫子)’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난징 진회강(秦淮河) 남쪽에 자리해 있다.

송나라 인종 원년인 1034년에 건립되었다. 화재와 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보수와 재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가장 큰 공자 사당이지만, 중국 전역의 공자묘 중에서는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상당해 난징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알려졌다. 1991년에는 중국 40대 여행지 중 하나로 지정된 바 있다.

푸쯔먀오는 난징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있다. 이 일대는 중국에서 가장 큰 시가지 중 하나로 꼽히니 꼭 둘러볼 만하다.

공자 사당 주변으로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상점가, 노천 카페 등 볼거리가 많다.

푸쯔먀오 내에는 크게 공자를 모시는 다청뎬(大成殿)과 학문 기관인 쉐궁(学宫), 예전 과거 시험이 치러졌던 장소인 장난궁위안(江南贡院)으로 나뉘어 있다. 이중 쉐궁은 난징 교육의 성지로 알려졌다.

동진 함강(咸康) 3년인 337년 진회 남안에 태학(太學)을 세웠다가, 북송 경우(景祐) 원년 1034년 현재의 자리로 쉐궁을 옮겨왔다. 장난궁위안의 내부에는 당시 과거 시험을 보는 모습을 재현해 눈길을 끈다. 과거를 보는 선비들의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설치한 감시 시설 명원루(明远楼)도 볼 수 있다.

푸쯔먀오 옆으로 진회강이 흐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주변 지역 모두 전통 가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난징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밤마다 야시장이 열리며 음식점, 골동품 가게들이 함께 늘어서 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 등불 축제인 ‘금릉등회(金陵灯会)’가 열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중국 전통 놀이와 공예품 전시, 무술 시연, 풍물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푸쯔먀오 [Nanjing Confucius Temple, 夫子庙]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40일간 30만명의 양민을 학살한 현장

 

답사팀이 이번 답사에서 가장 가슴아픈 곳으로 기억하는 곳이 남경대학살기념관과 난징 이제항위안소 유적 진열관이었다.

남경대학살기념관 입구에는 커다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한 어머니가 죽은 자식을 움켜쥐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울부짖는 상이었다.
이 동상 하나로 이곳의 모든 비극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듯 했다.


동상 하나만으로도 비극의 현장이라는 사실이 느껴지는 곳.
이곳에서는 라이터도 들고 들어갈 수 없었고, 사진도 찍지 못하게 했다.

라이터는 입구에서 모두 반납하도록 했고, 밖으로 나올 때 통에 닮겨 다시 갖고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기념관은 모두 3개의 코스로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가며 이 비극의 현장을 바라보는 수 밖애 없었다.
그리고 1937년이라는 글자와 300000이라는 숫자가 이 슬픔 모두를 단번에 전했다.


당시 난징의 인구는 100만명, 이 중 30만명이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인구의 3분이 1일 죽은 것이다.


더욱이 당시 부패한 정치인과 부자들은 미리 다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고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서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들의 잔혹상을  들으면서는 더욱 눈물겨웠다.


여자들은 어린아이건 노인이건 모두 강간을 당했다고 하며, 임신한 여인은 배를 갈라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남자들은 산 채로 모아놓고 함께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이곳을 찾으면 일본인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된다고 하며 애국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된다고 한다.

 

 

 


당시 1만명을 파묻었던 곳에 만들어진 이곳 기념관에는 당시 묻혀있는 모습 그대로 일부를 전시하고 있었다.
수십개의 사람들의 뼈를 직접 볼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래를 전하는 평화의 광장으로 이어진다.


한 여인이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아이를 안고 서 있는 모습이다.
이는 앞으로 평화를 추구하며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라고 한다.

 


남경대학살기념관(南京大虐殺記念館)

  남경에 입성한 일본군이 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약 40여일에 걸쳐 시민과 포로 등 약 30만 명을 살해하고 도시 전체를 피바다로 물들인 남경대학살사건의 바로 그 자리에 건설된 기념관이다.

 잔인한 전쟁의 흔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역사,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은 이러한 사실을 증언하는 사진과 생존자의 증언, 후에 발굴된 인골들을 그대로 전시해 놓고 있다.

흰 콘크리트 묘처럼 생겨 있어서 다소 삭막하게 느껴지는 감이 있지만 그때의 생생한 사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역사 체험관이다.

 

 

 


난징 이제항위안소 유적 진열관


 난징은 과거 50여 개의 위안소가 존재했던 지역이다.

그 중 ‘이제항위안소’는 기존 건물을 위안소로 이용한 사례인데, 1937년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후 이제항 2호는 ‘동운 위안소’, 이제항 18호는 ‘고향루 위안소’ 로 개조됐다.

이중 동운 위안소는 고 박영심 할머니가 갇혀 있던 곳으로, 중국에선 유일하게 외국인 위안부가 고통을 겪었던 현장으로 직접 지목한 위안소다.


 ‘이제항위안소 유적’은 난징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위안소로 쓰이던 건물에 박물관을 개장한 것이기 때문에 건물의 좁은 복도와 가파른 계단, 이어지는 쪽방들로부터 당시의 위안소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물품, 매표소 시설을 복원한 방, 조각상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ENDLESS FLOW OF TEARS’ 등의 예술 작품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전시품을 집대성했다. 


 1998년 현장이 발견된 뒤 오랜 기간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2008년엔 외부 골격만 남고 전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징 시 정부를 끊임없이 설득한 쑤즈량 교수의 노력으로 2014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후 정비를 마쳐 2015년 위안부기록관으로 개장하게 됐다. -대학신문(2018.3.25.)에서 인용-(출처 : 흥사단본부 독립유공자 후손과 함께하는 임시정부 탐방 자료집)

 

 

 

성노예 또는 종군위안부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재항위안소 유적은 우리에게도 또하나의 슬픈 역사다.

이 슬픈 역사의 현장이 난징에 그대로 남아 당시의 비극적인 모습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시 사용했던 침대 등이 그대로 남았고 중국 당국에서는 이를 버리지 않고 아직도 지키고 있다는 점이 참 놀라운 일이었다.

1935년~1938년간에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후 동운 위안소와 고향루 위안소로 개조해서 사용했고 총 여섯관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제항 2호 제19번 방은 조선위안부 박영심할머니가 3년동안 일본군 성노예로 갇혀있던 곳으로 2003년 11월21일 할머니께서 직접 현장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그대로 복원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 지역은 개발지역으로 허무는게 좋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문화유산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철저한 관리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전시관 입구로 들어설 때는 투시기를 통해 우리가 들고 온 물건들을 검사했고 마당에는 중국,한국인 등 위안부의 얼굴사진이 벽에 전시돼 있었고 그중에 두분이 한국분이라는 소개도 있었다.


이처럼 양자강을 중심으로 북경과 남경을 가르지만 남경은 옛날부터 이곳을 차지하려는 전쟁으로 수십만명이 죽어간 곳이라 역사는 깊지만 역사적인 건물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전쟁으로 모두 파괴돼 버린 곳이 많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를 간직한 남경을 떠나며 착잡한 심경이었다. 우리 답사팀은 이곳을 나와 4시간을 다시 더 달려 다음 목적지인 항주로 향했다.

 

 

 

 

 

 

 

 

 

 

 

 

 

 

 

 

 

 

(이 기사 계속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