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기행5]“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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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5]“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 고현준
  • 승인 2019.10.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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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흥사단 중국답사5)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

 

 

[답사 마지막날]항저우의 식저육시(食猪肉詩)..동파육의 유래

 

답사팀이  항주에서 마지막 행선지인 상해로 돌아올 때 중국역사를 꿰뚫고 있는 가이드 이순화 씨는 동파육의 유래에 대해 말해주었다.

소동파가 항저우 태수로 있을 때 서호에 소제라는 제방을 쌓아 산책로를 만드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소동파가 이곳을 떠날 때 항저우 사람들은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고마움을 담아 그곳에서 많이 나는 돼지고기와 채소 등 많은 물건들을 소동파가 가는 길에 드시라고 갖고 왔다고 한다.

소동파는 이곳을 떠나기전 주민들이 갖고 온 돼지고기와 채소 등 물건을 모두 큰 솥에 넣어 삶도록 해서 고을 사람들과 다 함께 나눠 먹자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소동파가 만들어준 돼지고기 요리를 맛있게 먹었는데 주민들이 너무 맛있다며 만드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요리법을 배운 후  그 다음부터 항저우의 유명한 요리로 자리잡게 됐다고 한다.

 “항주의 돼지고기는 질은 좋고 가격은 싼데,

부자는 거들떠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요리할 줄을 모르네.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은 후 제맛이 난다네”

소동파의 식저육시(食猪肉詩)라는 시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동파육은 각종 채소와 돼지고기를 푹 삶아 먹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간장조림과 비슷한 모양이다.

물에서 오랫동안 푹 삶았으니 기름은 다 빠지고 맛이 없을 리 없다.
동파육은 소동파라는 시인에 의해 그렇게 탄생했고 이름도 동파육이 됐다고 한다.

 


상해에서 다시 만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상해로 다시 돌아온 중국답사 마지막 날..답사팀은 200년전 상해의 모습을 볼수있는 상해 옛거리와 1926년부터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했다.


이곳은 3.1운동을 계기로 일본통치에 항거하기위해 1919년 4월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을 하여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선포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수차례 이전을 하며 1926년에 보경리4호로 옮겨왔고    이곳에서 1932년 상해를 떠날때까지 7년동안 이용했던 장소다.

답사팀은 특히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옛 홍구공원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의 사당 매정이라는 곳에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윤봉길 의사는 처자가 있는 몸이었지만 결연히 거사를 결심하고 김구 선생을 만나 그런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당시 김구 주석은 뭔가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때 나타난 윤봉길 의사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의거 전날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함께 앉아 마지막 식사를 했고 지금도 두분이 만나 마지막 식사를 했던 식당이 남아있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 거사일에 김구 선생에게 자신의 은시계를 전해주며 “선생님 이 은시계를 선생님 시계와 바꿔 차게 해 주십시오, 제게 이 시계를 사용할 시간은  한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김구 선생이 차고 있던 시계와 윤봉길 의사가 전해준  두 개의 시계는 역사유물로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 답사팀이 노신공원(홍구공원)을 찾았을 때 어떤 중국인은 한국어로 윤봉길 의사에 대해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영원히 기념..’ 등의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줘 우리를 놀라게 했다.

예전에도 이곳에 왔던 사람은 “저 중국인은 한국인이 나타나면 저런 글을 써서 보여준다”고 했다.

넓고 편안해 보이는 이 공원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찾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넓기도 했지만 너무나 아름답게  잘 꾸며진 공원이었다.

윤봉길의사 기념관 입구에는 ‘윤봉길의사 생애 사적전시관’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윤봉길 의사 사당은 입구에서 입장료(15위안 한국돈 3-4천원 정도)를 받고 입장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곳 한곳에는 노란 석물로 만든 ‘윤봉길의거 현장’이라는 표지석이 만들어져 그곳이 의거현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매정이라는 이름의 윤봉길 사당은 기와집 2층으로 된 구조였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흉상 뒤에는 ‘장부출가생불환(남자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가 쓴 글씨와 함께 전시돼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했다.

 

 

 


2층에 올라가니 그의 서한중에서 윤 의사의 동생인 죽파 윤남의 선생이 쓴 글도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더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우리 답사팀은 25세때 홀몸이 아님에도 이런 거사를 감행할 수 있었던 그 용기와 결단에 깊은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25세와 비교할 때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요..?  놀랍습니다.”라고 했더니 이번 답사팀중 가장 연장자인 임창효 단우는 “당시 시대가 젊은이들에게 그런 용기를 결심하게 만든 요인이 됐던 것”이라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닥치면 언제든 그런 의인은 나타나게 돼 있다”말했다.

우리는 또 중국인들 또한 윤봉길 의사를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용기를 갖고 더욱 일본에 저항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김구 주석과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과의 만남도 그 거사이후 이뤄진 것이라 의미는 더 컸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 한 사람의 희생이 나라를 일으키는 독립운동에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곳에는 성남시 의원들이 단체로 찾아와 사진을 찍고 개인마다 일일이 윤봉길 의사의 흉상옆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는 야큐정전 등 당시 지식인으로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던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노신동상 옆에서 이번 답사여행의 소감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사실 노신의 묘지가 이곳으로 오기전에는 홍구공원이었고 당시 도시락 폭탄을 던진 곳 또한 현재 노신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신의 묘지가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진 후 그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의 위치에 기념관이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김구 선생 등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몸바쳐 숭고한 희생을 하신 많은 선조들과 윤봉길 의사같은 의인들이 지키고 만들어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한 방문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 사당옆 기념물 판매대는 문을 모두 닫아 어떤 기념품도 살 수 없었던 점이 많이 아쉬웠다.

 

 

 


윤봉길의사 의거 현장(홍구공원)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는 일제가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식과 상해사변 승리축하식을 거행하는 것을 이용하여 일제의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 7명을 처단하는 ‘홍구공원 의거’를 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상해파견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가 즉사하는 등 홍구공원 의거는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윤봉길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이송되어 그해 12월 19일 가나자와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공원 안에는 윤봉길의사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높이 받들기 위해 매정(윤봉길 의사의 아호인 매헌에서 따왔다고 함)이 2층 기와집 형태로 지어져있고 내부에는 2003년 11월 개관한 전시실이 조성되어있다.

현재 홍구공원은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의거 현장 근처에는 루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매정과 기념비는 의거 현장에서 30-4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상해흥사단과 함께 한 제주흥사단 첫 외국에서의 월례회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제주흥사단 중국 답사의 대미는 답사 마지막날 밤에 이뤄졌다.

제주흥사단 발족이래 처음으로 외국에서 그것도 흥사단 상해지부(회장 배제진)와 함께 월례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이날 월례회가 열린 상해코리아타운은 한국에 있는 모든 음식점이 그곳에 다 만들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한 곳이었다.


제주흥사단(대표 고영철)은 상해지부와 기념물을 교환하고 오랜만에 한식으로 함께 식사하며 오랜 지기를 만난 듯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서..

 


상해를 떠나는 날 오전, 우리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자리잡았던 임시청사 유적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중국의 국경일을 맞아 길은 많이 막혔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라는 노란 표지가 우리를 안내했다.

골묵에 마련된 이 유적지는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 안에 조그맣게 자리잡고 있었다.

전시관 2층으로 올라가니 당시 임시사무실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전시되고 있었다.

이곳이 지역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옆 자리가 제1차 중국공산당대회가 열린 곳이라 많은 중국인들이 방문하는 바로 그 옆에 소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을 나오니 더욱이 이 지역은 전세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했다.
서구식 식당과 카페들이 즐비했고 중국의 다른 곳에 온 것처럼 특별한 곳이었다.
골목골목이 모두 그림처럼 예쁘게 꾸며져 어떤 길을 걸어도 좋은 그런 장소였다.

서양인은 물론 동양인 중국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걸으며 복잡한 골목길과 서구식 카페거리를 즐기고 있었다.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터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망명지사들이 상해에 모여 동제사(同濟社)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았고,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1918년에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만들고 이어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32년 상해사변(上海事變) 직전까지 상해에는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중심의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흥사단(興士團), 김원봉(金元鳳) 중심의 의열단(義烈團), 정화암(鄭華岩) 중심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지사들이 곳곳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4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있던 13년 동안 상해 임시정부는 어느 한 건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며 초기에는 부처마다 여러 개의 청사를 쓰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임시정부청사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랑로(馬浪路 : 지금의 馬當路) 306롱(弄) 보경리(普慶里) 4호의 3층짜리 벽돌집으로, 이 건물은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로 활동지를 옮기기 전까지 사용했던 상해시대의 마지막 청사인 것이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된 곳은 김신부로(金神父路=현재 瑞金路 二街)이며, 이후 장안로(長安路=현재 金陵中路 大安里) 267호, 고잉의로(高仍依路=皐蘭路) 11호, 하비로(霞飛路=淮海中路) 535호․329호, 포석로(蒲石路=金陵西路) 신민리(新民里) 14호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926년 보경리 4호에 정착했던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급격히 변화하는 외부 환경과 내부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많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19년 10월 상해의 일본인 세력은 임시정부가 폭탄제조를 비롯한 폭력활동을 주도한다는 구실로 임시정부를 프랑스 조계지에서 축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1922년 다나카 저격사건이 있은 후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임시정부는 영국과 미국 조계지로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보경리 4번지 임시정부 청사 구조는 1층이 회의실이고 2층이 집무실, 3층이 요인숙소와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유적지로 조성된 것은 1990년 2월이다.

 

 


김구가족 거주지 염경방
상해시 황파남로 350롱 일대

우리는 김구 선생 가족이 살았다는 염경방이란 곳에 도착했지만 이곳은 식당으로 변해버려 위치만 확인하고 그 위치의 겉모습만 감상했다.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김구 선생이 살았을 동네 골목길을 돌며 상해를 마음껏 즐겼다.


김구는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현풍 곽씨 사이 장자로 태어났다.

 1893년 동학을 접한 뒤 황해도 팔봉접주(八峯接主)로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다. 이후 1895년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했고,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896년 치하포(鴟河浦) 객주에서 일본군 육군중위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처단하고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언도받았다. 1898년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승려가 됐다.

1900년 환속한 뒤 강화도에서 신교육 운동을 전개했고, 이 시기 이름을 김구(金龜)로 고쳤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서 전덕기·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늑약 반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서명의숙과 양산학교 등에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에는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고, 다음해 안악사건으로 피체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한민족의 독립이 선언되자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그해 4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의 지도기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무국장에 임명됐다.
이후 김구는 ‘정부’의 내무총장과 내각수반인 국무령, 그리고 한국독립당을 창립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옹호하는데 앞장섰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주도했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해방 된 조국에서 자주적이고 통일적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김구는 1922년부터 1926년까지 상해 프랑스조계 ‘貝勒路 永慶坊 10號’에 거주했다. 영경방 10호는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정정화 부부가 거주했던 곳이었다.

1922년 7월 김가진이 상하이에서 타계하고 정정화가 서울에 머물게 되면서, 김의한은 최중호와 김구 가족에게 이 집을 넘겼다.

 1층은 최중호가 사용했고 김구 일가는 2층에 거주했다. 최중호는 김구가 교장으로 재직하였던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수학한 독립운동가였다. 김구는 모친 곽낙원,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 인(仁), 신(信)과 이곳에 거주했다.

최준례는 이 집에서 둘째 아들 김신(金信)을 출산한 후 낙상사고로 늑막염이 발병했고, 결국 폐병으로 악화되어 1924년 타계했다. 1925년 나석주가 아내를 잃은 김구를 위해 본인의 의복을 저당 잡혀 생일상을 차린 곳도 이곳이었다.

김구는 이것이 죄스러워 죽는 날까지 생일을 지내지 않기로 하고 『백범일지』를 쓸 때 일부러 자신의 생일 날짜를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모친 곽낙원은 김신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갔고, 김구는 첫째 김인을 데리고 뤼반루(呂班路) 단층집을 세내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살았다

 


흥사단 원동원부 도산 거주지터 방문

그리고 이날 상해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거주하던 집이었다.

골목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집은 개인 소유라 들어갈 수 없었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흥사단을 창립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거주하던 집은 아담한 2층집이었다.
복잡한 미로같은 골목길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집은 현재는 개인소유라 안으로 들어갈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는 참 단아한 모습이었다.
멀리 집이 보이는 곳에서 답사팀은 단체사진을 조용히 찍고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흥사단의 꿈은 그 집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살던 곳’이라는 표시라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경우 국가간 협약이 필요한 사항이라 추진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1919년 도산은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어가며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를 조직하기 위해 이광수·주요한·김여제·이규서·차리석으로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미주의 박선제와 김항주를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20년 1월부터 입단(서약)문답을 실시하고 임시위원장 안창호와 이광수·차리석·주요한·손정도(서무)·이규서(재무)·장덕로(張德魯, 장성산, 검사) 등으로 임원진을 구성하여 9월 20일 상해에서 창립기념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 설립 경위

 1919년 3.1 독립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당시 상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으며,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여러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 때 의장에는 이동녕(李東寧), 부의장에는 손정도(孫貞道)를 선출했다. 초대 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安昌浩), 외무총장에 김규식(金奎植), 군무총장에 이동휘(李東輝), 재무총장에 최재형(崔在亨), 법무총장에 이시영(李始榮), 교통총장에 문창범(文昌範)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그 후 22일 2차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령, 중국령, 미국령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같은 시기에 당시의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시베리아(대한국민의회)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결국은 상해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임시정부는 초기에는 국무총리제를 채택했으나, 그 후 대통령제, 국무령제, 국무위원제를 실시하다가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이동한 후에는 국무주석제를 실시했다.

이승만이 계속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혼란이 거듭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동휘, 이동녕, 박은식(朴殷植), 이상룡(李相龍), 홍진(洪震), 김구(金九) 등이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상해임시정부 주요활동

 1919년 6월 내무총장으로 안창호가 취임하여 교통국(交通局)과 연통제(聯通制)를 조직,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계파간의 갈등으로 혼란에 빠지고, 이어 1923년 국민대표회가 결렬되고 난 이후에는 급속히 세력이 약해졌다.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탄핵당한 이후, 김구가 지도자로 취임했으며, 김구는 1932년 수차례의 항일 무력저항 사건을 일으키고 1933년에는 장개석과 항일전선협력에 합의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는 상해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1940년에는 중경(重慶)으로 그 본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태평양전선으로 확대된 1941년 12월 9일에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 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그 이후

 광복 후 한반도 남부에 진주한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해체되고 만다.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해선 임시정부 내에서도 우파와 좌파 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좌파는 국내외 단체와 민중의 기초 위에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한 반면, 한독당 측은 임시정부를 가지고 귀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후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이 ‘실세’로 그대로 남았고, 임시정부의 통일노선이 제1공화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계승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4. 임시정부 본부 소재지 변천사
1. 상해 : 1919.04-1932.05
2. 절강성 항주․가흥 : 1932.05-1933.12
3. 강소성 남경 : 1933.12-1934.03
4. 강소성 진강 : 1934.03-1935.11
5. 강소성 남경 : 1935.11-1937.11
6. 호남성 장사 : 1937.11-1938.07
7. 광동성 광주 : 1938.07-1938.10
8. 광서성 유주 : 1938.10-1939.03
9. 사천성 기강 : 1939.03-1940.03
10. 중경 : 1940.03-1945.11
11. 1945.11.23. 환국(제주흥사단 정리)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委員部)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단체 흥사단(興士團)의 원동(遠東) 지부격인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가 결성됐다.

1919년 안창호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내무총장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한 그는 ‘정부’의 조직 강화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운동 일선에 투입·활약해 줄 청년 인재들이 필요하였다.

이에 안창호는 미주에 있는 흥사단원 박선제와 김항작을 상하이로 불렀다. 1920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한 이들은 인재들을 모으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상하이 주요 인사들에게 흥사단 약법을 인쇄·배포하면서 흥사단의 주의와 취지를 선전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 결과 1920년 2월부터 많은 청년들이 흥사단에 입단하기 시작했다. 초기 흥사단원으로 가입한 이들은 주로 상하이 지역에 조직되었던 신한청년당 당원들이었다. 이를 토대로 같은 해 12월 29일 상하이에서 흥사단 대회를 처음 개최하고 조직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후 1921년 9월 미주의 흥사단을 본부로 하고 국내를 포함한 중국·연해주·일본을 관할로 하는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라는 명칭으로 정식출범하였다.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는 중국에서 한민족의 독립을 최고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 실천에 주력했다.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는 처음 ‘慕爾鳴路 彬興里 301’호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1924년 3월에는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이 설립되자 ‘南京 管家橋 太平巷 6號’에 사무실을 이전했다.

그러나 난징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집회가 허용되지 않자 1925년 1월 원동대회를 마친 뒤 다시 상하이 ‘霞飛路 大德里 1,014弄 30號’로 옮겼다.

 이후 잠시 ‘美仁里 10號’를 사용하다가 1929년부터는 ‘霞飛路 1,014號 26號’를 사무소로 사용했다.(출처 : 국가보훈처)

 

 

제주흥사단 중국답사팀과 함께한 이번 4박5일간(9월25-29일)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제주흥사단 중국 답사는 중국이라는 나라와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여행이었다.

올해는 중국공산당이 만들어진 70주년이라고 해서 중국은 어딜 가나 이 국경일을 상징하는 각종 표어와 중국 5성홍기가 길거리에 나부끼고 있었다.


제주로 돌아오기 위해 상해 푸동공항을 향해 달리는 동안 다시 창을 통해 본 상해는, 상해라는 도시의 역동성과 중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는 듯 했다.

중국은 대한민국과 수교후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흔적을 잘 지키고 보살피며 문화유적으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라고는 하지만 이미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앞서는 국가발전을 차차 이뤄가는 중이고 우리는 아직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답답하게 비교되기도 했다.

그들은 날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주저앉아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누가 앞으로 중국을 개발도상국이라 부를 것인가.  정신적으로도 이미 중국은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서 있다고 보았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한국은 또는 제주는 그들의 발 아래로 추락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 여행이었다.

그만큼 중국은 지금 무서운 호랑이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기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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