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남국산두 극찬..신촌리 매계이선생(이한우)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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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남국산두 극찬..신촌리 매계이선생(이한우)유적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0.14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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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1862년 10월 민란 일으키자 1863년(철종 14) 창의 격문 지어 자신의 충의를 세상에 알렸다.

신촌리 매계이선생(이한우)유적비

위치 ; 조천읍 신촌리 신촌초등학교 정문 안쪽

시대 ; 일본강점기(1931년)
유형 ; 비석(기념비)
크기 ; 높이 93㎝, 너비 41㎝, 두께 19㎝

 


비문 ; 梅溪李先生遺蹟碑
士之稱賢者固以行以不以文然文亦載道之器而惟德之光華也其亦不可少之明矣 先生行治旣列於三網文章又冠乎南國則先生蓋士之賢而有文者哉 先生姓李諱漢雨字次文梅溪其號也 睿源桂城君諱□恂之后以□純祖癸未生于濟州新村里第聰明絶倫十三通經史嘗試講官衙聳動視聽時牧李公大稱賞之旣長就正于秋史金先生正喜其詩與文遂成大家觀光于京師睦承旨仁培見而之曰李某湖南士林之冠寃使其子從遊且本州名碩小栢安違三二樂李啓徵海隱金義正石湖高永昕諸賢亦皆出門下其著乎外者如是而存乎中者蓋可驗矣 先生孝友根天志物俱至乙亥外艱哀毁逾制服闋 而有疾自知不起適當親忌語其衆曰今日吾當倍親而歸力疾行祭禮畢正席而終乃□高宗辛巳正月二十三日與先公設同日也噫先生生于南荒之遐 得大家文獻之淵源名播京鄕實南國士林光耿而後學之津筏也 當日褒典之未蒙難關世運之沿革後世杖屢之迷所豈非吾鄕之況替也哉 修菴康用範是懼焉及與鄕衆圖其不泯鄕中人士同聲伐石而記之以寓仰倣之壞峕先生沒後五十九年己卯正月二十三日新村鄕士一同謹志(□표시 부분은 글씨가 없음)


비문에는 매계 선생의 이름이 '漢雨'라고 되어 있으나 북제주군 비석총람 696쪽에는 '이한진 선생의 덕망 등의 기록과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나온 것을 기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해석은 다음과 같다.(해석 ; 김태국)

梅溪李先生遺蹟碑(매계 이선생 유적비)


士之稱賢者 固以行 而不以文 :선비가 어질다(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진실로 실천하는 행동이요 문장으로는 아니다
然 文亦載道之器 而惟德之光華也: 그러나 문장 또한 도를 싣는(표현하는) 그릇이요 오직 덕의 광채이다


其亦不可少之也 明矣: 그 또한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先生行治 旣列於三網 文章又冠乎南國: 선생의 행적과 (덕을) 닦은 것은 이미 삼강(떳떳한 도리)에 나열되어 있고, 문장 또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다


則先生 蓋士之賢 而有文者哉: 그렇다면 선생은 아마 선비 중에 어질고 문장도 있는 사람일 것인져!
先生 姓李 諱漢雨 字次文 梅溪 其號也: 선생은 성이 李이고 휘는 漢雨이며 자는 次文이고 梅溪는 그 호이다.(원래 漢震이나 나중에 왕가의 족보를 새로 만들 때 震자를 피하여 雨로 고치도록 명하니 이 때 漢震에서 漢雨로 개명되었다.)


璿源桂城君諱 恂之后: 왕족인 계성군(성종의 자) 휘 恂(순)의 후손으로
以 純祖 癸未 生于濟州新村里: 순조 계미년 제주 신촌리에서 태어나셨다.


第聰明絶倫 十三 通經史: 어려서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열 세 살에 경서와 역사서를 통달하였다.
嘗試講官衙 聳動視聽: 일찍이 과거시험 보는 관아에서 보고 듣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감동시키니


時牧李公大稱賞之: 당시 목사 이공이 크게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旣長就正于秋史金先生正喜: 이미 장성하여서는 추사 김선생 정희에게 취정하니
(就正: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가 자신의 是非(시비)를 質正(질정)하여 바로 잡음)


其詩與文 遂成大家: 그 시와 문장이 마침내 대가를 이루었다.
觀光于京師 睦承旨仁培 見而詡之曰: 京師(경사: 서울)에 유람하는데 승지 목인배가 보고 아름답게 여기며 말하기를


李某湖南士林之冠冕 使其子從遊 且本州名碩: 이모는 호남 사림의 冠冕(관면: 으뜸)이다 하고 그 아들로 하여금 교유하게 하니 또한 본주의 명성이 커지게 되었다.
如 小栢安逹三 二樂李啓徵 海隱金羲正 石湖高永昕: 소백 안달삼 이락 이계징 해은 김희정 석호 고영흔 같은
諸賢 亦皆出於門下: 여러 어진이들이 또한 문하에서 나오니
其著乎外者 如是 而存乎中者 蓋可驗矣: 그 겉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다면 그 속에 보존된 것은 대개 증험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제자들이 이와 같다면 마음에 흠모하는 제자들이 얼마나 될지 증험 할 수 있다)


先生 孝友根天 志物俱至: 선생의 효성과 우애는 天性에 근본하여 마음으로나 물질로나 모두 다 지극히 하였다.
乙亥外艱: 을해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니
哀毁逾制 : 슬픔에 몸이 여윈 것이 법도(법으로 정한 상례)를 넘었다. (야윌만큼 아버지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니 법으로 정한 상례를 넘어 매우 슬퍼하였다)


服闋而有疾自知不起: 삼년 복을 마치자 병을 얻었는데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아셨다.
適當親忌 語其家衆曰: 마침 부친 기일을 당하여 그 가솔들을 모아 놓고 말하여 가로되
今日吾當陪親而歸: 오늘 나는 마땅히 부친을 모시고 돌아가겠다 하고
力疾行祭 禮畢正席而終: 병을 참고 제를 행하여 예를 마친 후 자리를 바르게 하고 임종하니
乃 高宗辛巳(1881)正月二十三日 與先公沒同日也: 바로 고종 신사년(1881) 정월 23일로 先公과 같은 날 몰하셨다(先公: 돌아가신 아버지)


噫 先生 生于南荒之遐陬: 슬프다! 선생께서는 남쪽 변방의 먼 모퉁이에 태어나셔서
得大家文憲之淵源 名播京鄕: 대가들의 학문 법도의 연원을 얻어 명성이 서울과 시골에 알려졌으니
實南國士林之光耿 而後學之津筏也: 실로 남쪽 지방에 사림의 밝은 빛이요 후학들의 진벌(津筏: 나루를 건너는 뗏목: 목적을 이루는 도구)이다.


當日褒典之未蒙 雖關世運之沿革: 당일 포상하는 법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은 비록 세상의 운수가 변천된 것에 관계되었다 하겠으나
後世杖屨之迷所 豈非吾鄕之沉替也哉: 후세에 장구들이 거처를 잃어버리면 어찌 우리 지방의 침체가 아니겠는가?


(杖屨:고대에 50세가 되면 지팡이를 짚을 수 있었고 신을 벗고 방에 들어가도록 우대함, 노인과 윗사람에 대한 경칭)
修菴康用範庸是懼焉: 수암 강용범이 이로 말미암아 걱정을 하여
乃與鄕衆圖其不泯 鄕中人士同聲而起: 곧 향리의 여러 사람들과 그 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꾀하니 향리의 인사들이 같은 소리(옳다고 찬성하여)로 일어나
遂伐石而記之 以寓仰倣之懷: 마침내 돌을 깎아 그 사실을 기록하고 우러르고 본받으려는 생각을 부쳤다.


峕(時) 先生沒後五十九年己卯(1939)正月二十三日 新村鄕士一同謹志: 때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 59년 기묘(1939) 정월 23일 신촌리 선비 일동은 삼가 기록하노라.

이한우
생몰년 ; 순조23년(1823)~고종18년(1881)
본관은 전주. 자는 차문(次文), 호는 매계(梅溪). 초명은 이한진(李漢震)이다. 아버지는 이신구(李信九)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 김덕하(金德河)의 딸이다.


아버지가 마을에서 서당을 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쉽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향시에 합격하여 여러 차례 전시에 응시하였으나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시골 선비가 급제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국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독서에 몰입하여 천문·산경·지리·병서 등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시에 능하였다. 1853년(철종 4) 제주목사 목인배(睦仁培)는 이한우의 글을 보고 ‘남국산두(南國山斗: 남국의 태산이요 북두칠성)’라고 극찬하였다.


이한우는 23살 때 대정으로 추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유배기간 내내 추사의 가르침을 받은 이한우는 제주 문인 오태직(吳泰稷)·김용징(金龍徵) 등과 교유하였고, 안달삼(安達三)·김희정(金羲正)·이계징(李啓徵)·고영흔(高永昕)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10곳을 선정하여 ‘영주십경(瀛洲十景)’이라 하고 시로 읊었다.


이한우는 현실에 무감각한 유생은 아니었다.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 조정에서 삼정책문(三政策問)을 전국에 내리자 이한우도 삼정책(三政策)을 올렸다.


이한우는 삼정책에서 “세금 거두는 것이 한도가 없어 백성은 편안히 살지 못하고 마을이 피폐해져 비게 되었고 밭에 소나무가 서 있어도 세금을 걷고, 수확이 전혀 없어도 걷는데, 한 줌이나 한 묶음이냐 하는 것은 오로지 아전의 붓끝에 맡겨지며, 결수를 숨기거나 더하여 걷는 세금의 반이 관리들 주머니로 들어가며, 정리로 주는 뇌물은 해마다 들어 마침내 고질이 되어버렸다”라고 하여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1862년 10월 강제검(姜悌儉)·김흥채(金興采) 등이 민란을 일으키자 1863년(철종 14) 창의 격문을 지어 유림에게 돌려 자신의 충의를 세상에 알렸다.

1873년(고종 10) 제주에 유배된 최익현(崔益鉉)과 만나 우국충정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저서로 『매계선생문집(梅溪先生文集)』이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080507, 보완 1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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