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와 함께 가을을 걷는 올레.."이런 게 제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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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와 함께 가을을 걷는 올레.."이런 게 제주다"
  • 고현준
  • 승인 2019.10.16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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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2코스 신도2리-용수포구, 바닷가 절경이 빛나는 무릉도원길

 

 

가을에 걷는 올레는 올레를 걷는 묘미를 더하게 만든다.

덥지 않은 날씨에 공기는 청량하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잘 어울려 풍광을 더해준다.

억새가 흐드러진 들길,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가을 올레는 마음 설레는 작은 여행이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넘어가는 경계를 지나는 제주올레12코스를 걷는 지난 12일은 완연한 가을이었다.

친구 고광언과 둘이 나선 올레길.

지난번 신도2리까지 걸었기에 신도2리 포구에서 이날 올레걷기는 시작됐다.

중국여행 등 각종 가을행사 등 바쁜 일정으로 근 한 달 만에 나선 길이었다.

성산 시흥에서 출발한 올레1코스부터 걷기 시작한 고광언은 드디어 반을 걸었다며 즐거워 했다.

시작이 반이다. 그렇게 시작하기만 하면 곧 끝이 나타난다.

일본을 강타한 태풍이 제주도 근방을 지나서인지 신도2리 포구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흙먼지가 날리며 거리를 어지럽혔다.

 

이날 우리가 처음 만난 풍경은 바닷가에 서 있는 신도2리라는 돌로 만든 표지석이었다.

이 표지석에 쓰여진 내용과 함께 신도2리에 대한 설명(제주도 마을약사)을 찾아 적는다.

 

신도2리 마을약사

 

제주 서도는 본래 동 서의 거리가 멀어 지역 방어상 곤란이 컸기 때문에 태종 16년(1416년) 丙申,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하여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부를 200리 거리에서 양분하여 양현을 세우게 되었다. 동을 정의, 서를 대정이라 칭하고 대정구역을 다시 동 법환(法還), 서 판포(板浦), 북 저지, 남 마라도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당시 본리 지역에는 인가가 없었으나 그 후 중종 14년(1519년) 己卯 사화도지사 이세번(李世蕃)이 대정현 둔포(돈포)에 유배되어 적거생활(귀양살이)를 하다가 현지에서 적사(謫死)하므로 현 고산리 신물경에 안장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서기 1588년을 전후하여 본리에도 인가가 집주(集注)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업을 주업으로 하여 모여살기 시작했으나 당시만 해도 왜구들이 포구를 중심으로 노략질이 심할 때 인지라 주민들이 안주하기에는 불안한 형편이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지세가 출중하고 살기좋은 현재의 「농남봉」을 의지하여 한 두가구 이주하여서 20여가구의 촌락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본 마을 설촌의 최초 시작이다.

이들은 비교적 광활하고 비옥한 농경지를 개간하며 생활의 터전을 잡고 1599년 윤남못 등 음료수원을 개정하고 삶의 터전을 이루어 나갔다.

대정현의 서면 13동에 속한 본리는 그후 100여년 동안 구역을 동으로는 「굽은악」으로 하고, 서로 대해, 남으로 일과리와 접한 「돈두악」, 북으로 두모와 접한 당산봉으로 4표를 정하고 부락을 관할하였다.

1730년을 전후하여 마을이 점차 커짐에 따라 1732년(임자년) 구남무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1745년경 경주 김씨 구적 씨등 삼각골에 3∼5가구가 분산했었고 현재는 인가가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 있으나 1750년을 전후하여 곤물, 군물, 고분장도 등 여러곳에서 인가가 분사되었다 전한다.

그 후 1768 구남무기는 부락의 면모를 갖추어 중장이라 불리웠으며, 이무렵 현 무릉 2리 인향동에도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1780년 전지동에도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1794년 ∼ 1800년 구남무기(중장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크게 형성됨으로 하여 행정단위 부락으로서의 「무릉리」가 분리되었다. 1750년 경에는 「논깍」(현, 신도2리), 1795년 경에는 「비자동」(현, 신도3리)이 분리 설동되었다.

1914년 세부측량(한국토지조사) 당시 구역 관리상 난점이 있다 하여 신도라 개명하면서 도원(桃源) 경내에 속했던 인향동, 뱅두못, 전지동 등이 무릉리에 편입되었고, 한장동 일부가 고산리에 속함으로 인해서, 현법정 신도리 구역이 확정되고 그 후 한국토지조사가 끝나는 해인 191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행정상 신도를 1구와 2구로 분리되었다.

관리구역을 1구는 현 「신도 1리」구역, 2구는 현 「신도2리」구역(현 신도3리포함)으로 정했다가 조국 광복후 현 신도3리 주민들의 생활여건에 맞도록 마을을 제도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주민들의 의견에 의하여 1946년 신도 2구에서 신도3구로 분구되었고 1953년 직제 개편으로 구를 리로 하고 각 리마다 리장이 중심이 되어 리를 통솔하게 되었다.

 

 

 

신도2리는 환경으로 승부하겠다며 개발을 멀리 하고 있는, 이 마을의 자연환경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강경택 이장이 있는 마을이다.

강경택 이장은 “신도2리는 자연환경이 너무 좋은 곳이라 마을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사업 등은 하지 않고 있다”며 “재정은 모자라긴 하지만 후손들을 위해 이 환경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 어떤 수익사업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밝혔던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신도2리 마을은 여전히 예전 제주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운 마을로 남아있다.

이 마을길을 걷는 내내 보기에 불편한 시설이나 눈에 거슬리는 아파트 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신도2리의 마을별칭은 무릉도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내 모든 마을이 해안을 매립하여 땅을 늘리고 곳곳에 아파트 등 거대한 시설을 만들어 주변 환경을 훼손하고 있지만 신도2리는 여전히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그 정신 또한 참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드넓은 밭이 펼쳐진 평야지대를 지나 수월봉을 바라보면 걷는 동안 한라산은 마을 뒤로 버티고 선 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올레를 걷는 우리를 반겼다.

수월봉을 오르는 동안에도 한라산은 쉴새 없이 우리를 뒤따랐다.

수월봉을 오르는 중간에 서서보니 멀리 모슬봉과 단산 녹남봉 산방산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평야가 주는 평화였다.

 

 

 

수월봉에 오르니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고산기상대.

예전에는 고산기상대를 지나거나 바로 옆길로 수월봉을 걷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래쪽으로 올레길은 안내하고 있었다.

당산봉을 바라보며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니 차귀도가 바로 눈앞이다.

제주고산리 유적과 고산리마을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지질트레일코스로 이어진 엉알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곳에서는 이곳 수월봉 지질공원에 대한 해설이 시작돼 많은 관광객들 앞에서 이 지역 지질공원에 대한 설명이 이뤄지고 있었다.

잠시 앉아 얘기를 들어보니 해설자는 장순자 씨로 “해녀를 하다가 65세에 해설사 자격을 따서 지금 해설을 하고 있다”는 멘트를 하고 있었다.

고광언은 이들 앞에서 “얼마 전에 방송에 나오시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렇다”며 반가워했다.

이 말을 들은 관광객들은 박수를 치며 더 반가워했고 장순자 씨는 그렇게 말로 배려해 준 고광언에게 감사를 표했다.

 

 

 

엉알길은 수월봉 아래 바다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엉알은 큰 바위, 낭떠러지 아래라는 뜻이다. 응회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지층을 볼 수 있는 지질학습장이다 라는 올레안내판이 이곳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니 예전에는 약수라고 해서 아무 불편없이 마셨던 용운천 등의 석간수지만 안내문에 “용천수 음용불가, 수질불합격 판정으로 식수가 불가합니다”라고 적혀 있어 아쉽게 만들었다.

불과 수년전에도 마음놓고 마셨던 물인데..

이 지역 석간 용천수는 그동안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물이 나오는 곳곳 가득 가득 흘러넘칠 정도로 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고광언은 “이 물은 먹을 수도 있을 같다”며 “수질검사를 지속적으로 해서 식수할 수 있다는 안내를 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곳은 특히 ’누이를 목놓아 부르는 동생의 눈물‘이라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수월봉에는 안타까운 남매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어머니의 병환치유를 위해 오갈피를 찾아 절벽을 오르다 누이 수월이가 떨어져 죽었다. 이에 동생 녹고도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 죽고 만다. 그 후로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불렀고, 남매의 효심을 기려 이 언덕을 ‘녹고물오름’ 또는 수월봉‘이라 불렀다. 그러나 실제 녹고의 눈물은 해안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아래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 나오는 것이다.

이 엉알 해안길은 걸어가는 곳마다 절경이 수월봉과 차귀도 등과 함께 이어져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수월봉도, 검푸른 바다도, 그리고 해안에 펼쳐진 용암돌들 그 모두가 겹쳐진 이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이 길 따라 나타나는 길 위를 흐르는 질펀한 물이었다.

이 길을 만들 때 배수시설을 하지 않아서인 듯 길 위로 물이 흘러 흥건했다.

오름을 따라 내려온 물이 배수로를 따라 흘러나가야 하지만 왠일인지 이 길에는 물이 철철 길 위를 흐르고 있었다. (한경면 건설팀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확인을 한 후 연락을 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연락은 없다.)

이 길을 걸어나와 자구내포구를 지나 당산봉을 올랐다.

 

 

 

 

당산봉

원래 이름은 당오름이다. 옛날 당오름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모시는 신당이 있었는데 이 신을 사귀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면서 차귀오름이라고도 불렀다는 올레안내판이 서 있었다.

 

당산봉은 2개의 화구가 있는 곳이었다.

하나는 원형, 또 하나는 말발굽형 화구가 연이어 나타났다.

당산봉 능선으로 가는 오솔길은 산길을 걷는 묘미가 있다.

능선에 오르면 차귀도 앞바다가 훤하게 트여 검푸른 바다가 나타난다.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차귀도는 앞에서 보면 조그만 봉우리로 보이지만 뒤로 보면 2개의 섬으로 이뤄진 독특한 모양새다.

거북이모양 같기도 하고 헤엄치는 코끼리로도 보인다.

이 조그만 섬은 용수리 쪽에서 보면 사람이 물을 잔뜩 먹어 배가 부른 상태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억새가 나부끼는 능선을 따라 걷는데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30여명 남짓, 제주시에서 왔다는 산악회원들이 단체사진을 찍어가며 우루루 지나갔다.

당산봉 능선을 지나면 용수리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당산봉 끝자락 오솔길이 이 당산봉의 진짜 비경에 속한다.

한라산과 바다와 섬과 멀리 보이는 마을의 모습 그리고 이 길이 주는 정겨움이 마지막 발걸음을 흐뭇하게 만든다.

우리보다 먼저 갔던 산악회원들은 올레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나타났다.

절벽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 절벽길을 다 나와 지나쳐 온 길을 뒤로 보니 숨어있는 비경이 따로 없을 정도로 바닷가 절경이 아름답게 등장했다.

절벽도 바다도 그 자체만으로 “이런 게 제주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바다를 향해 그곳에 놓여있는 빈 의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 쓸쓸히 놓여있는 의자 3개가 바다색과 어우러져 누군가에게 자꾸 앉아보라고 권하는 듯 했다.

이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서 만난 억새꽃..제주에 드디어 가을이 왔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시..

이곳 바다에는 각종 해안쓰레기가 산더미처럼 널려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제주해안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는 쓰레기 문제..

더욱이 쉬려고 팔각정에 앉으려고 했을 때는 건설폐기물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마구 버려져 있는 모습도 나타났다.

쓰레기섬을 우리들 중 누군가가 만들고 있는 셈이었다.

 

 

멀리 있는 자연환경은 아름답지만 이곳을 더럽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아름다움을 가질 자격이 없는 일이다.

이제 종점이다.

1코스부터 걷기 시작해 12코스까지 왔다.

서귀포시 지역 올레를 다 걷고 이날 드디어 제주시 올레길로 입성했다.

제주올레의 반 정도를 돌았으니 이제 걸어 가야할 올레 또한 반이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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