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덕1리 마을만들기 사업, 그 성공의 열쇠는..'정성'
상태바
"귀덕1리 마을만들기 사업, 그 성공의 열쇠는..'정성'
  • 고현준
  • 승인 2019.10.22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탐방2)평생교육사 제주도협회가 진행한 마을살리기 지도자 전문과정 따라 '귀덕1리' 가 보니..

 

 

제주도의 마을만들기 사업, 그 성공의 열쇠는 무엇일까.

한국평생교육사 제주특별자치도협회(회장 한경찬)는 이와 같이 마을살리기 성공을 위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지난 19일 평생교육사 마을만들기 지도자 전문과정을 진행했다.

협회 회원 등 25명이 참가한 이번 과정은 도내 4개 마을(청수리, 귀덕1리, 녹고뫼, 유수암 등)을 직접 찾아 마을이장 등의 설명을 듣고 마을살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는 주민들의 노력을 듣는 그런 자리로 마련됐다.

각자 전문성을 갖고 있는 평생교욱사인 이들 회원들이 이번에 방문한 4개의 마을은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수익 사업 등 모범적으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대표적인 마을을 방문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방문 이후 회원들은 앞으로 육지부 등 마을살리기를 성공적으로 추진해온 여러 마을을 찾아 다니며 각 마을의 성공적인 사례를 듣고 제주도내 마을에도 이를 접목시켜나갈 계획이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된 이번 과정은 한 마을에 1시간 밖에 설명을 들을 수 없는 짧은 시간 때문에 구체적인 과제들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들 마을마다 특색있는 마을만들기에 전념하는 많은 사례들 들으며 많은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다.

결국 마을을 리드해 나가는 이장 등 마을대표자들의 정신이 가장 중요한 성공과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마을마다 겪었던 많은 어려움을 공유하기도 했다.

본지는 이번에 탐방한 모범적인 마을만들기에 성공한 4개 마을을 차례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우리 팀이 두번째 찾은 마을은 귀덕1리(이장 이남근)였다.

처음 귀덕1리에 도착했을 때 우리 앞에 선 새로 지은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산뜻하게 다가왔다.

이날 마을에 대한 소개는 이곳 2층에 마련된 강당에서 이남근 이장이 직접 맡아 그동안 진행해 온 많은 성과들을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으로 전달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희생적인 노력과 적극성이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그런 많은 일들을 정말 다정다감하게 설명했다.

이남근 귀덕1리장은 “귀덕에 살고 있었지만 마을 일에 무관심한 청년이었고, 우연한 기회에 마을 일을 맡게 되면서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처음으로 마을학교 살리기 사무국장을 맡게 돼 마을 임시총회를 하는데 성원이 안돼 이후 마을 일에 관심을 갖게 된 적극적인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귀덕1리는 “마을 주민들이 양파 양배추 등 수입이 보장돼 있어서인지 마을일에는 관심이 떨어진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장은 “전임 이장님이 연세가 높으셔서 적극적으로 이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워 그때 이후 이장을 맡기로 했고 이장이 된 지 올해로 3년째”라고 했다.

“귀덕1리는 한림읍 21개 마을중에 507세대에 인구 1200명으로 큰 마을에 속한다”고 소개하고 “농사도 비트는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남근 귀덕1리장
이남근 귀덕1리장

 

이 이장은 “귀덕본향당(할망당)은 동네 최초로 3년이상 사법고시 합격자가 나올 정도로 주민들의 관심이 많은 곳”이라며 “지금도 합격을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이장은 특히 이장이 된 후 영둥할망이 맨 처음 들어오는 곳이 복덕개에서 영등신맞이 환영제를 문화행사로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더욱이 이 행사는 귀덕리는 1,2,3개리가 있지만 매년 2월 초하룻날에 열리는 이 행사에는 3개 마을이 모두 함께 참여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영등신이 제주로 들어온다는 귀덕 복덕개에서는 영등신맞이 환영제를 통해 귀덕리를 포함한 제주도내 모든 마을의 한해 무사안녕을 기원한다고 한다.

이 이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행사는 또 있다.

과거에 이곳에 있었던 장날을 복원, 선주민과 정착주민 그리고 지역상인과 지역주민의 화합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밤마실장터다.

이 장터에는 지역주민만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이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등 마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하지만 지속적으로 프리마켓을 운영해 본 결과 팔 수 있는 물건이 똑 같아 식상하다는 지적이 있어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직은 문화행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긴 하지만 행사를 계속 할수록 관심이 높아져 어촌계에서는 소라꼬치를 팔고 주민들은 수확한 농산물을 파는 등 마을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마을에서도 한번 시작해 볼 것을 권했다.

이 이장은 “지역주민과 외지에서 온 분들이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을에서 노력하고 있고, 다른 마을도 다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잘 안 되는 것 같다”며 “외지에서 온 분들의 역량과 주민들의 관심만 있다면 함께 화합하고 공존하는 방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귀덕1리의 자랑꺼리 중 또 하나는 만원의 행복이라는 자체복지기금이다.

경노당 예산이 너무 부족하다고 해서 우리끼리 한번 해보자고 해서 시작한 일인데 출향민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2년째에 접어들며 2백명 가까운 분들이 매달 1만원 씩을 내고 있다는 것.

이 자체복지기금으로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에게 “귀덕에 살아주셔서 고맙다는 뜻으로 2달에 한번 식사를 대접하고 명절 때는 선물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어르신들에 대한 복지는 경로당 셔틀버스 운영과 노인일자리 창출로까지 발전했다.

마을회 차원에서 경로당도우미 6명, 빈집지키기 10여명, 아이놀이 도우미 4명, 하교 도우미 10명, 쓰레기 분리수거 도우미 2명, 장애인 일자리 4명 등 모두 60여명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만들어 매달 27만원씩을 지급한다고 하며 최고령자는 93세 어르신도 있다고 하니 마을회의 노력이 참 눈부실 정도였다.

이 노인일자리는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이장은 학교살리기 운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주민숙원사업인 귀덕초등학교를 활상화하기 위해 다세대 주택 8세대를 신축했다.

이 또한 마을 주민 모임인 대왕이친목계에서 부지 3쳔평을 기증, 출향민을 포함한 주민들의 모금활동을 통해 2억7천만원의 기금을 조성해서 건립한 것.

이후 기존 60여명의 학생수로 분교 위기에 있던 귀덕초는 학생수가 90여명으로 크게 늘었다고 했다.

마을에서는 초등학교 가족을 위한 임대주택을 운영하고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복지는 규약을 만들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는 교복과 졸업앨범비등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귀농인의 집도 2채를 만들어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이 미리 와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고, 마을배움터에서는 부녀회 회원들을 위한 줌바덴댄스 메이크업 등의 교육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남근 이장은 “이장으로써 남은 1년간 주민들이 합심할 수 있는 마을 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며 “다음에 어떤 사람이 이장이 되든 모든 사업들이 차질없이 추진되도록 이미 모든 사업단 등이 다 갖춰져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 이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결국 마을의 발전은 마을을 이끄는 이장단 등 리더들의 정성이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회원들은 "이장을 더 오래 맡아서 마을 일을 더해달라"는 뜻으로 박수를 치며 이남근 이장을 격려했다.

 

 

 

다음은 마을이 전하는 귀덕1리 마을소개다.

 

귀덕1리 마을약사

 

마을약사본리는 옛날부터 石淺村(석천촌)이라 불리웠다. 이 마을 사동(沙洞) 북방 0.5km 해상에 自然熔岩島嶼(자연용암도서)가 2개 있는데 이를 "큰여""작은여"라고 부르며 이 마을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이것을 이름하여 "石淺島(석천도)"라고 불렀으며 마을 이름을 "석천촌(石淺村)"이라고 불렀다.

西記 1212(高麗 熙宗 7)年에 제주에 현(縣)을 설치하면서 石鏡縣(석경현)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으며 당시에는 늬커리(四肢洞)와 중동(都舍洞)에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의 문물이 발달하였던 곳이라 근래에도 마을 일대에서 古瓦(고와) 즉 고려시대의 기와가 출토한바 있다.

元의 통치 시기인 서기 1273년 고려 원종 14년(원세조 9년)에는 남송과 이론의 요충지라하여 원은 초토사 군민도달노화적(軍民都達魯花赤) 총관부를 설치하면서 늬커리(四枝洞)에 대사찰을 건축하고 당수덕 부근에 신당(神堂)을 세워 종교문화를 발달 시키고 무사들의 훈련장소인 사장(射場)밭에서는 무사들이 활쏘기를 하면서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연대 및 망대를 설치하여 해상방위 및 교통통신의 요새지로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서기 1300년 고려 충렬왕 16년에 제주도에 14현(縣)을 설치할 때 본리(本里)에는 무인(武人)과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하여 중국(中國) 중경(重慶)지방의 명을 따서 귀덕현(歸德縣)으로 이름지어 불렀다 한다.

서기 1370년 목호(牧胡 - 원나라 백성으로 목동일을 보던 사람 - 사람들이 사악하고 유부녀 겁탈 및 살인 방화를 자행하던 자들)의 난(亂)을 평정하기 위해 제주에 목호를 정벌하러 내려온 장군 최영(崔瑩)은 새별오름에서 목호를 토벌하고 소랭이왓(귀덕리 45번지)부근에서 난을 평정했다하여 간중이(亂終)란 지명이 만들어 졌다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서기 1609년 기서(己西) 광해원년(光海元年) 제주판관 김치(金緻)가 현제(懸制)를 폐지하고 방리제(坊里制)를 실시하면서 귀덕리가 되었고 서기 1832년 마흘동(馬屹洞)과 다교동(多橋洞), 신서동(新西洞), 사동(寺洞), 사동(沙洞), 장흥동(長興洞) , 장로동(長路洞), 라신동(羅新洞) 등 8개동이 설치되었으나 문외동(門外洞) 및 그 외의 동(洞)은 사람들이 이주로 부락이 없어지고 사동(寺洞)과 사기동(四枝洞)을 합하여 장라동(長羅洞)으로 도사동(都舍洞)을 중동(中洞)으로 개칭하였다.

 

행정상으로는 한일합방 직후부터 경민장(警民長) 또는 리장(里長)을 두어 마을을 책임 관리 하였다. 일제치하에서는 귀덕리를 4개 구(區)로 분할하여 리장 산하에 구민제(區民制)를 두었으며 1區에는 사동, 하동, 중동을 2區에는 장흥동과 장라동을 3區에는 성로동과 신서동을 4區에는 마흘동과 다교동을 합하여 행정을 구분하였다.

서기 1945년 해방이 되고 서기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 구장을 리장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 서기 1948년 4·3사건이 일어난 후 서기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던 해의 11월 24일 마흘동이 공비들에게 피습되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서기 1951년 6월 1일 공비방어 목적으로 성(城)이 축성되고 1대 고태원 이장 당시 귀덕리 4區는 4·3사건의 피해로 2개동이 1개동으로 합해졌고 8개洞에 각 동회장을 두어 리정을 관할하여 오다가 서기 1953년 10월 장흥동 장라동이 귀덕2리로 분리되었다가 2代 김성량(金性良)씨가 리장이 되면서 다시 귀덕리로 통합되었다.

1960년 3代 김창윤(金昌允)씨가 리장이 되면서 또다시 장흥동, 장라동이 귀덕2리로 분리되었으며 1963년 6代 양우종(梁禹鍾) 리장 당시에 귀덕 4區인 마흘동과 한교동(漢橋洞(多橋洞))이 분리되어 신흥리(新興里)로 불리어 오다가 1997년 5월 1일을 기해 신흥리가 다시 귀덕3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소개

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25㎞지점에 위치하여 한림읍에서 제일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서 한림읍의 16절경중의 하나인 귀덕 석잔도 거북등대에서 바라보는 석천(石淺)예와 미역따는 해녀들의 모습, 그리고 배들이 들고나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곳. 한라산맥이 서쪽으로 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북쪽으로 뻗은 반도와 같은 광활한 마을인데도 산이 없고 해안가에서 중산촌까지 평탄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풍부한 어장을 기반으로 반농반어의 생활을 영위하는 곳으로서 청정해역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싱싱한 어류가 풍부한 곳으로서 찾아오는 방문객 모두가 푸른 환경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위치

제주시 중심지에서 서북쪽으로 25㎞떨어지고한림읍사무소에서 동쪽으로 5㎞떨어진 방위상으로는 북위 33도 22분에 위치해 있다.


동쪽은 애월읍 금성리 정지내(鼎子亭川)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귀덕2리와 남쪽은 해안가로부터 4㎞떨어진 조소천 상류를 경계로 상대리와 접해있고 북쪽은 직사각형을 남북으로 늘어놓은 것같은 형국을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