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고뫼권역사업, 그 성공의 열쇠는 '희생과 봉사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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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고뫼권역사업, 그 성공의 열쇠는 '희생과 봉사정신'"
  • 고현준
  • 승인 2019.10.2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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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3)평생교육사 제주도협회가 진행한 마을살리기 지도자 전문과정 따라 '제주캠핑장' 가 보니..

 

 

제주도의 마을만들기 사업, 그 성공의 열쇠는 무엇일까.

한국평생교육사 제주특별자치도협회(회장 한경찬)는 이와 같이 마을살리기 성공을 위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지난 19일 평생교육사 마을만들기 지도자 전문과정을 진행했다.

협회 회원 등 25명이 참가한 이번 과정은 도내 4개 마을(청수리, 귀덕1리, 녹고뫼, 유수암 등)을 직접 찾아 마을이장 등의 설명을 듣고 마을살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는 주민들의 노력을 듣는 그런 자리로 마련됐다.

각자 전문성을 갖고 있는 평생교욱사인 이들 회원들이 이번에 방문한 4개의 마을은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수익 사업 등 모범적으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대표적인 마을을 방문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방문 이후 회원들은 앞으로 육지부 등 마을살리기를 성공적으로 추진해온 여러 마을을 찾아 다니며 각 마을의 성공적인 사례를 듣고 제주도내 마을에도 이를 접목시켜나갈 계획이다.

이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된 이번 과정은 한 마을에 1시간 밖에 설명을 들을 수 없는 짧은 시간 때문에 구체적인 과제들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들 마을마다 특색있는 마을만들기에 전념하는 많은 사례들 들으며 많은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다.

결국 마을을 리드해 나가는 이장 등 마을대표자들의 정신이 가장 중요한 성공과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마을마다 겪었던 많은 어려움을 공유하기도 했다.

본지는 이번에 탐방한 모범적인 마을만들기에 성공한 4개 마을을 차례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우리가 세번째로 방문한 곳은 녹고뫼권역사업으로 추진한 유수암리에 있는 제주캠핑장이었다.

넓은 잔디밭이 푸르게 우리를 반긴 이곳에서는 많은 캠핑족들이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이날도 서울에서 내려온 단체객들이 자녁에 열리는 세미나를 앞두고 녹고뫼오름을 올랐다고 하는 설명을 들었다.

유수암,소길, 장전리 등 3개마을 소득사업으로 추진한 녹고뫼권역 마을사업(휴양팬션 제주캠핑장)은 이제 안정궤도에 진입하고 있다.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사업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성찰과 이익보다 손해를 보자는 희생정신이 만든 결과다.

그러한 희생정신은 사업도 잘 되게 하고 그 사이에 땅값도 많이 올라 이 사업을 추진했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만족하는 좋은 결과까지 가져왔다.

휴양팬션 제주캠핑장을 운영하는 녹고뫼권역사업은 영농조합법인으로 현재 이 사업을 추진했던 강창희 대표이사가 책임자로 있다.

강창희 대표이사

 

강창희 대표이사는 ”녹고뫼권역사업은 녹고뫼오름을 중심으로 유수암 소길 장전 등 3개 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져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들 3개 마을이 처음에는 인구가 2천명에 달하기도 했지만 이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장전초 학생수가 300명에서 60명으로 줄어 이 지역 유입인구를 늘리기 위해 권역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이 권역사업을 시작하다 보니까 우연찮게도 엄청난 인구유입으로 학생수는 260명 인구는 4천명이 넘을 정도로 큰 마을로 변모하게 됐다“며 ”이는 가수 이효리가 소길리에 와서 살면서 마을을 알린 이유가 크다“고 전했다.

강 대표는 ”이효리 씨의 남편도 작곡가라 평소에 알고 지내던 작곡가들이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됐고 이후 연예인 화가 등 문화예술인이 유수암이나 소길리에 많이 와 살게 되면서 마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특히 ”외국에서 오신 분들도 많아 이들 문화예술인 등을 중심으로 지역포럼을 만들어 운영되고 있다“고 말한 강 대표는 ”이 포럼에서는 어떻게 좋은 마을을 함께 만들어 나갈까를 늘 연구하고 있다”며 “이 포럼에도 운영진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동기로 녹고뫼권역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지만 초기 추진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된 문제는 마을간 갈등이었다고 한다.

권역사업을 하다보니까 처음에 60-70억 지원금이 나오기도 했는데 마을마다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는 그런 갈등 문제가 커서 위원장 등 지도부가 사업을 추진하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는 것.

적재적소에 예산을 써야 하는데 마을에서는 예산을 더 가져가려고만 하는 등 뜻이 달라 예산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강 대표는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지역역량강화 교육을 많이 진행했다”고 했다.

"이후 진짜 마을에 필요한 순서를 정해 예산을 쓰자고 해서 그런 일을 이해시키고 위원장이 적재적소에 예산을 쓸 수 있도록 배정하는 등 그런 일이 가장 힘든 과정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런 일들이 해소되고 난 후 예산의 70%는 지역 기반시설 즉,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기반시설에 많이 투자했다"고 한다.

강 대표는 “소득사업은 법인을 만들면 80%는 도에서 20% 자부담으로 지원을 해주긴 하지만 그 지원금은 오직 건물을 짓는 데만 쓰라고 보조사업을 해주는 방식이었다”고 말하고 “소득사업도 처음에는 신청자도 없었고 무슨 소득사업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난감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캠핑장.

강 대표는 현재 캠핑장이 있는 이곳에 법인을 만들 때 참여조합원들에게 “이익을 보겠다고 한다면 참여하지 말고 손해를 보겠다고 한다면 참여하라고 했다”며 “희생정신이 아닌 이익만 가져가겠다고 한다면 나와 같이 사업을 하지 못한다”는 뜻을 강력하게 전했다고 한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고 마음 먹는 순간 법인은 종이 날 것이라는 마음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등의 노력을 통해 이 뜻과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로 구성했다”는 일화도 소개해줬다.

“지금 생각하면 고생은 했지만 보람은 있다“는 강창희 대표는 ”캠핑장 부지는 7,500여평에 이르고 소득은 올해 말이 되면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것 같다“고 뿌듯해 했다.

하지만 “이곳에 이르기 까지는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이어 강 대표는 ”마을 소득사업의 경우 봉사한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특히 ”책임자가 열정을 갖고 일하려면 마을 주민들이 무한신뢰를 가져줘야 가능하다“며 ”전국적으로 봐도 보조금을 받는 사업이 성공한 사례는 극히 적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보조금은 내 돈이 아니라는 마음 때문에 내 주머니에서 내 돈이 나와야 관심도 갖고 열정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부담이 없으면 관심도 열정도 생기지 않는 법“이라는 점에서 ”공무원들도 처음에는 우리의 성공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했었다“고 전했다.

강 대표는 ”이곳을 실사하러 온 공무원들에게 이곳에 30억원을 투자했다고 했더니 공무원들도 그동안 보조사업을 보면 보조금만으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놀랐다고 했다“며 ”이곳에 벤치마킹하려는 마을에서 많이 방문하지만 늘 자부담이 많아야 관심과 열정이 생긴다며 그런 마음이 기본적으로 지원사업을 추진하는 정신이 돼야 한다“고 전했다.

현재 이곳 캠핑장은 단체 모임과 세미나 등 연중 자연에서 가족단위 캠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결국 녹고뫼마을사업의 성공사례는 봉사하려는 희생정신을 가진 지도자들과, 이들을 무한신뢰 해 주는 주민, 그리고 진정으로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투자하려는 자부담에 대한 이해 등 이런 모두의 마음이 결집돼 만든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전리 마을약사

장전리의 설촌 유래를 밝히려면 지금으로부터 7세기 전 고려 삼별초시대 대몽항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아야 한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1270년(고려 원종 11년) ∼ 1273년(원종 13년)에 강화도를 거점으로 몽고세력에 반대하여 일으킨 항쟁으로 삼별초의 지휘관인 배중손(裵仲孫)은 왕족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강화도에서 사태가 불리해지자 해상권을 잡기 위해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후 제주를 비롯하여 30여개 도서를 지배하며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그후 조정의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관군과 몽고군이 합세한 연합군의 반격에서 승화후(承化候) 온(溫)이 살해되고 배중손도 전사했는지 소식이 묘연해지자 세력은 날로 약해졌다.

당시 별장이었던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마지막으로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원종 12년, 1271) 이미 제주를 점거하고 있던 이문경(李文京) 장군, 남해현(南海縣)을 점거한 유존혁(柳存革) 장군과 합류했다.

김통정장군은 여몽연합군의 반격에 대비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지금의 애월읍 고성리)에 거점을 정한 후 안팎 이중으로 된 내성(內城. 石城으로 750m)과 외성(外城. 土城으로 15리)을 쌓았다.

동쪽으로 고성천(古城川)과 서쪽으로 갈구미천(渴驅味川. 속칭 '갈구미내')에 이르기까지 총 24만평에 달하는 천혜요새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즈음에 김통정 장군은 항파두리 주변 요소에 지형과 지세를 이용하여 삼별초군과 제주인 장정들이 훈련할 장소를 물색한 것이다. 활쏘기, 기마훈련, 무예닦기 등 무술훈련용으로 가장 적당한 지형을 선정하고 활용했던 장소들이 항파두리 주변에 있음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이 장소를 사장밭(射場밭)이라 하여 우리 마을에도 구전으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훈련장소가 현재 장전마을 일대라고 추정되는 것이다.

이 당시부터 장전마을에 항몽군사들과 제주의 장정 및 주변 사람들 등 촌락형태를 이루어 집단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최초의 일이라는데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소길리 마을소개

231여가구에 526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소길리는 하귀2리 남쪽 5km지점에 위치하였는데, 주위가 약간 높은 지대로 둘러싸인 분지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조용하고 평화스런 마을이다.

감귤이 주민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산간 작은 부락의 특성상 마을 주민끼리 친척처럼 화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인정많은 마을이다. 감귤림이 우거진 평화로운 마을 소길리이다.

 

마을위치

제주시내에서 서쪽으로 일주도로를 따라 약 12km를 가면 애월읍 하귀 2리가 있는 여기서 한라산쪽으로 약 5km쯤 남서쪽으로 가면 주위가 약간 높은 지대로 둘러 쌓인 분지에 8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용하고 평화스런 마을이 있는 여기가 소길리이다.

이 소길리는 북동쪽에 장전리, 서북쪽에 용흥리, 동쪽에 유수암리, 남동쪽에 거문덕이 등 4개의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이며, 지도상으로는 위도 북위 33°26'6", 동경 126°22'54"에 위치하고 있다.

범죄없는 마을

본리는 8개 성씨(高, 白, 夫, 朴, 梁, 李, 任, 金)가 거주하고 있는데 온 마을 주민이 서로 돕고 뜻을 한데 모아 마을 자체에서 향약을 제정하여 몸소 실천함으로써 1978년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되었다.

이는 마을주민들이 이웃을 내몸같이 보살피는 정성과 서로를 믿는 마음이 컸음을 증명함이었다.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되면서 제주도민의 고유정신인 삼무정신을 실천하는데 온 주민이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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