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토벌대의 방화 학살, 무장대의 습격.. 태흥2리 무도동성(마을성담)
상태바
[향토문화]토벌대의 방화 학살, 무장대의 습격.. 태흥2리 무도동성(마을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0.25 0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재 태흥초등학교 뒷 울타리 50m 정도가 당시 성담이다

태흥2리 무도동성(마을성담)

위치 ; 남원읍 태흥2리 970-3번지. 태흥초등학교 뒷울타리
유형 ; 방어유적(마을성담)
시대 ; 대한민국

 


태흥리는 남원읍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남원리, 동쪽으로는 신흥리가 인접해 있다. 태흥리는 4·3 당시 1리, 2리와 삼덕동(현재의 3리) 등이 있었다. 태흥리는 1948년 10월에 들어서면서 4·3의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10월 중순부터 남원지서에서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 고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0월말에는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하고 토벌대의 방화와 학살, 무장대의 습격과 학살이 이어졌다. 11월에도 토벌대에 의한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1949년 1월 20일경에는 의귀리에 주둔했던 2연대 군인들이 태흥1리 군부동산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에 의해 도피자 가족들이 총살당하기도 했다. 100여명의 인명피해 중 80명 정도는 토벌대에 의해, 20명 정도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태흥리의 축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늦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48년 11월 28일 무장대의 습격 때에도 마을에는 성이 없었다. 1949년 1월 2연대가 주둔하면서 축성도 같이 이루어졌다.

축성은 태흥1리와 2리의 경계인 하천을 중심으로 서로의 구역을 따로 쌓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성으로 마을을 둘렀다. 삼덕동 사람들은 이 성안으로 소개되었다.

성을 쌓은 후에는 무장대의 습격이 없었는데 이는 2연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습격의 여건이 안 되었던 것으로 주민들은 생각하고 있다.


현재 태흥초등학교 뒷 울타리 50m 정도가 당시 성담이다. 나머지 성담은 모두 과수원이나 집담, 밭담으로 되돌아가 형체가 없다. 1951년에 쌓은 태흥3리의 성담도 지금은 흔적이 없다.(제주4·3유적Ⅱ 273~277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