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원당봉 동쪽 소흘촌..삼양1동 서카름 앞개성창(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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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원당봉 동쪽 소흘촌..삼양1동 서카름 앞개성창(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0.30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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所訖(소홀)은 설의 한자어이니 설개라는 자연마을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삼양1동 서카름 앞개성창(포구)
 

위치 ; 삼양1동 1938-3번지
시대 ; 조선~일제강점기(1924년)

 

 



조선시대 기록된 《제주삼읍지》에는 ‘원당봉 동쪽에 소흘촌(所訖村, 설개의 한자식 표현)이 있고, 그 앞에 소흘포(所訖浦)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흘포는 소흘촌이라는 마을명에서 비롯된 포구 이름인데, 지금의 동카름성창을 의미한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所訖浦라고 하면서 兵船(병선)을 붙일 수 있다고 했다.

이증의 남사일록에는 漁人乘潮滿回泊小艇非他國人所可容易泊舡處(어인들은 밀물을 타고 와 소정을 붙이나 타국 사람들은 쉽사리 배를 붙일 곳이 못 된다.)라고 했으며, 濟州三縣圖(제주삼현도)에는 원당봉 동쪽에 所訖村(소홀촌)이 있고 그 앞에 所訖浦(소홀포)가 있다고 했다.

所訖(소홀)은 설의 한자어이니 설개라는 자연마을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성창(城滄)이라는 말은 탐라순력도 화북성조에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부터 포구의 방파제를 뜻하는 말로 널리 쓰였으며 최근까지도 사용했던 말이다.


삼양1동 속칭 서흘개(설개) 마을 공동어로집단은 동동네와 섯동네로 나누고 동네마다 전용포구를 갖고 있다. 설개에는 동카름성창 외에도 앞개성창(城滄)이란 포구가 있다.

섯동네 갯가에 있는 포구를 앞개 또는 앞개성창이라고 한다. 앞개란 마을의 바로 앞에 위치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앞개성창 안에는 엉덕물, 큰물, 서쪽물 등 담수가 사철 풍부하게 솟아오른다.


앞개의 입지 조건을 보면 앞개성창은 포구 북동쪽에 있는 고지콪이라는 곶부리를 의지하여 자리잡았다. 고지콪은 북동풍을 막아준다. 고지콪과 백사장(남서쪽)으로 외성(外城)을 쌓아 포구를 축조해 놓고 다시 그 안에 남북으로 성을 쌓아 포구를 나눴다.

포구 입구에 있는 공간을 밖개(外浦) 그 안에 있는 포구를 안개(內浦)라 한다. 이 포구의 입구는 수중암초들을 피해 서쪽으로 나 있다. 포구의 진입로에는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들었다고 한다.


앞개성창은 1924년에 개수되었는데, 개수 이전에는 썰물에 포구가 바닥을 드러냈다고 한다. 촌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금의 외항(밖개)은 바로 그 때에 축조되었다 한다. 개수 후에 포구가 확장되어 새로 생긴 바깥 칸에는 썰물에도 해수가 남아 있게 되었다.

포구 입구에는 이 일을 기념하여 세운 개수기념비(改修紀念碑)가 남아 있다. 개수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면 ; 都監督 李晩烈, 發起人 金在涉, 監督 金萬澤 夫錫祚 金元伯, 兼理事 高大吉
우측면 ; 斯港改修 衆力共之 而誰敦治 五監在玆(이 항구를 개수함에 많은 사람이 노력을 들였으니 이 일을 누가 가지런히 하였는가? 5인의 감독이 있었도다.)


후면 ; 洞首 宋儀奉 區長 高信千 公員 李晩行 安彭祚 二區洞首 姜達銑 區長 愼雨錫 庶務 文鳳昊
좌측면 ; 甲子五月五日三陽一洞


왼쪽 성창 안쪽에는 시멘트로 마감한 위에 조개껍질을 박아 나타낸 1968.8.12.라는 글자가 있어 이 때 시멘트로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왼쪽 성창 끝에는 삼각형 철제시설물을 설치했던 흔적이 있는데 도대불(옛등대)의 흔적으로 보이며, 오른쪽 성창 끝에는 비석이 하나 있으나 글자가 완전히 마모되어 내용을 알 수 없다. 추정컨대 도대불 설치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로 보인다.
《작성 080528, 보완 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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