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국태민안 빌어..아라1동 한라산신고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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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국태민안 빌어..아라1동 한라산신고선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1.01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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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옛날에 한라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터라는 뜻이다.

아라1동 한라산신고선비
 

漢拏山神古墠
위치 ; 제주시 아라1동 357-1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비석(유허비)
규격(cm) ; 34.5×71×16

 

 

한라산신고선(漢拏山神古墠)비는 산천단 산신제단 서쪽 가까이에 있는 비석이다. 墠은 '제터 선'이다. 따라서 이 비석은 옛날에 한라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터라는 뜻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한라산신제는 탐라국에서 비롯되었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음력 2월에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북쪽에 마련된 단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뜻으로 드리던 제사였다.

고려 고종40년(1253) 10월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神)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한라산신제는 일 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18년(1418) 4월 11일 예조에서 제주의 문선왕 석전제 의식과 함께 한라산제를 지냈다. 한라산제는 전라도 나주 금성산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아직도 한라산 백록담 북쪽 모퉁이에는 한라산 산신제를 지냈던 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정의현감 김성구의 『남천록(南遷錄)』에도 한라산 정상 못 북쪽 모퉁이에 “본주(本州)에서 늘 기우하는 단”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제례 의식은 그 뒤 2백여 년간 지속되었으나 산신제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얼어 죽는 사람이 발생하고 부상자가 생기는 등 폐단이 많았다.

이른 봄 한라산 정상에서 제를 올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박 2일에 소요되는 식량과 장비를 포함하여 산신제에 사용할 제기와 제물을 지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 산을 오르다가 사람이 죽는 등 사고가 잦았다.


제주목사로 취임한 이약동은,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거행하면서 동사상자가 생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지금의 산천단에 묘단을 건립하고 한라산 산신제를 봉행하였다.

이약동 목사가 이곳에 제단을 마련한 것은 이곳이 한라산의 주맥(主脈)이 개미등을 타고 북으로 뻗어내린 정면일 뿐 아니라 제주성과의 중간 위치에 해당되며 뒤에는 삼의양오름이 있고 소림천(小林泉)이라고 부르는 맑은 샘이 있어 제사를 지내기에 알맞은 곳이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약동 목사는 청렴한 관리로 널리 알려졌으며 청렴과 관련된 괘편암 이약동 목사는 청렴하여 제주에서 나는 물건을 일체 가져가지 않았는데 가던 도중에 문득 손에 쥐고 있는 말채찍이 제주도의 관물임을 깨닫고 되돌아가 그 채찍을 성벽 바위에 걸어 놓고 다시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그 후 제주의 향리들이 그가 걸어놓고 떠난 채찍을 그대로 두게 하였는데, 그 채찍이 오래되어 썩은 그 자리에 다시 채찍 모양을 그대로 본 떠 돌에 새겨 제주에 부임하여 온 목사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그 바위를 ‘괘편암(掛鞭岩)’이라 불렀는데, 아쉽게도 그 자취는 전하지 않는다.


, 투갑연 이약동 목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바다 가운데서 갑자기 배가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한 비장이 제주 사람들이 목사님 선물로 포갑(鮑甲=세수대야로 쓸 수 있는 큰 전복 껍질) 하나를 주길래 받았다고 하였다. 이 목사가 그것을 버리도록 하니 배가 나아갔다는 일화이다.
등의 일화가 전한다.


이후 한라산 정상에서 정기적으로 올리던 산신제는 없어지고, 전염병이 돌거나 가뭄이 드는 등 특별한 경우에 한해 산천단에서 비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 따르면 선조34년(1601)에는 김상헌이 선조의 명을 받아 한라산신제를 거행하였다. 1601년에 제주도 지역에서 소덕유․길운절의 역모사건으로 인심이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당시 역모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김상헌은 제주도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정성으로 한라산신제를 지낸 것이다.


그 후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섬 전체에 있던 당과 사찰을 없앨 때 산신제를 올리던 제단을 훼손한 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정조17년(1793) 11월 24일에는 제주어사 심낙수(沈樂洙)에게 향과 축문을 주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주현 명산대천의(州縣 名山大川儀)’에 의거하여 한라산신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순조원년(1801) 8월 1일에는 한라산신제와 풍운뇌우제의 향과 축문을 실은 배가 풍랑으로 난파해 향과 축문 모두 바다에서 유실되었으므로 다시 급히 내려주도록 건의하고 있다. 또한 헌종7년(1841) 7월 초나흗날에 한라산신제를 거행했다.

제주목사는 향과 축문이 중앙에서 내려오자 좌수․유생들과 함께 치제하였으며, 돌담을 두른 묘(廟)가 있어 그곳에 신패(神牌)를 봉안하고 옆에는 소나무 30~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고 하였다.


이들 사료를 통해 보면 해마다 봉행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한라산신제가 지속적으로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08년 한라산신제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고선비의 규격은 34.5cm×71cm×16cm이며, 비석의 왼쪽 아래 부분이 일부 깨어졌으나 글자는 훼손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석 전면 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장방형으로 얕게 파내고 그 안에 다시 글자를 음각하였다.


비석을 세운 시기를 적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세웠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낸 것이 이약동 목사 때 시작하여 이형상 목사 때까지는 정기적으로 봉행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1703년 이후 어느 해에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글씨가 가늘고 얕게 새겨진 사실로 미루어 판단하면 18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비석 옆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전면에 〈漢拏山下有一小山之下 州牧李約東公之□□ 噫一□□一□享祀 □□□審□基堀 乃一石□益□一庸〉이라 음각되어 있으며, 다른 하나에는 〈成宗元年牧使李約東建漢拏山神廟 先是每祭于山頂 人多凍死 至是爲立廟壇於州南小山下 卽山川壇〉이라 새겨져 있다. 두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비교해 보면 같은 사람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비석이 꺾여 분리된 것이 분명하다.

비석에는 총탄 맞은 자국도 있다.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한라산 아래 소산(소산오름)이 있고 그 아래에 산천단이 있다. 원래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냈는데 사람이 얼어죽는 일이 많았다. 성종원년(경인년)에 제주목사 이약동공이 이곳에 산신제단을 만들어 해를 이어 제사를 지냈다. 상전벽해로 제향이 이어지지 않으니 … 주춧돌을 발견하니 감회가 더욱 절실하다. … 우리가 우연히 이곳 북쪽에서 비석을 파내었다. … 鄭斗正 洪淳寧 김○○ ○○○
이라고 되어 있다.

비문에 廟라는 글자가 있고 주춧돌을 발견했다는 것을 보면 이곳에는 제단만 만든 것이 아니라 사당을 지었었을 가능성이 있다. 비석의 북쪽에 모아져 있는 둥근 돌들이 혹 그 주춧돌일까?


정두정 등 네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것은 그들이 위의 漢拏山神古墠이라는 비를 발견한 사실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홍순녕은 홍종시의 셋째 아들이며 제주여중 교장을 지내기도 했고 북제주 갑지역 제헌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 세웠다면 국회의원이라고 새겼을 테니 이 비석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즉 1948년 이전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도 묻혀 있던 것을 홍순녕의 동생인 홍순만씨가 1978년에 발굴했다고 한다.
《작성 080529, 보완 151015, 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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