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왜구 방어, 흔적 없는.. 하모리 모슬진성(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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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왜구 방어, 흔적 없는.. 하모리 모슬진성(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1.1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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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진만이 진이고, 나머지 여덟 곳은 방호소라 불러야 옳다고 주장도 있어

하모리 모슬진성(멸실)터

위치 ; 대정읍 하모리 770번지 부근 부둣가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진)

 

본래 진(鎭)은 변방의 방어를 위하여 북쪽 변방과 남부 해안지대의 목(牧) 또는 현(縣)에 구축한 군사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특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주로 남부 해안지대에 많이 설치하였다.

진을 방호소라고도 불렀다. 영조40년(1764)에 그 책임자가 만호(萬戶)로 승격되었던 명월진만이 진이고, 나머지 여덟 곳은 방호소라 불러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제주의 9진은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을 말한다. 위치는 수산진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닷가에 있다는 점이 공통적인데 이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9진의 설치는 이미 태종 때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곳에 성이 축조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맨 먼저 축조된 진성은 세종21년(1439)에 한승순 목사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졌던 차귀진성과 수산진성이다. 이들 두 진 앞에는 차귀도와 우도가 있는데, 이들 모두 왜구의 거점으로 활용될 우려가 큰 섬들이어서 서둘러 진을 설치했던 것 같다.


제주에서 진의 성벽은 모두 석축으로 자연석을 다듬거나 그대로 쌓아올렸는데 돌의 평평한 면을 바깥쪽으로 가게 하였다. 규모는 둘레 100m 정도의 조천진성으로부터 1,000m에 가까운 명월진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형태를 보면 사변형, 타원형, 반원형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이것은 지형에 맞게 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모슬진성은 원래 1510년 장림 제주목사가 가래방호소(강정동)에서 동해방호소(회수동)로 이전하여 진성을 축조하였었다. 숙종4년(1678) 윤장형 목사가 동해성(東海城)에 있던 동해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원래 현을 세울 때는 좌우에 2개의 진을 설치하였으니 정의현에는 수산진과 서귀진을 두었고, 대정현에는 동해진과 차귀진을 두었던 것이다.


모슬진성에 대해서는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이곳에 모슬진방호소가 있었으며,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모슬포수전소라고 되어 있다.

정조년간에 간행된 제주병제봉대총록에는 '모슬진'(摹瑟鎭), 역시 정조년간의 제주읍지에는 '모슬보'(摹瑟堡), 1842년경의 탐라지초본에는 모슬진, 1899년의 대정군읍지에는 '모슬성'(摹瑟城)이라고 되어 있다.


모슬진은 3면이 바다로 싸여 북쪽만 뭍과 연결되어 거의 섬처럼 된 암반 위에 설치하였다. 문은 북쪽으로 하나만 설치하였다. 탐라순력도를 보면 성문은 정면 1간의 루가 있는 우진각 초가다. 동문과 남성 사이에 객사와 병고가 조금 떨어져서 ‘ㄴ’자를 형성하고 있었고, 동문과 북성 사이에도 ‘ㄴ’자가 되게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들은 모두 우진각 초가로 되어 있었다. 성 내부에는 생수가 없고 성 밖에 신영물이 있었다.


남사록에는 성의 둘레가 315척, 높이는 12척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335척으로 넓혔다. 탐라지초본에는 사후선(伺候船) 1척에 書記 7명, 防軍 117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기록되었고, 대정군읍지에는 '有東一門城在石島上三面阻海中無泉城外有水'라는 기록이 있다.(남제주문화원, 南濟州 文化遺蹟 130~131쪽)


현재는 성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서남쪽으로 바다를 매립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을 가늠해 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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