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반디기왓의 맥..의귀리 김만일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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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반디기왓의 맥..의귀리 김만일생가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1.22 0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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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合水)하여 나아가니 자손이 번창하고 이름을 크게 날릴 형국

의귀리 김만일생가터

 

위치 ; 의귀리
시대 ; 조선
유형 ; 건물터

 

 

풍수지리에서는 한라산 동쪽의 주맥에서 한 가닥 떨어져 나온 지맥이 바로 '반디기왓'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김만일의 선대는 제주 제5음택혈인 '반디기왓'에 선조의 묘를 써서 발복했고, '반디기왓'에서 이어진 맥을 그대로 받은 이곳에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집 앞을 흐르는 하천이 반대편에서 물이 들어와 집터 양쪽으로 감고 합수(合水)하여 나아가니 자손이 번창하고 이름을 크게 날릴 형국이라고 보았다.

이 집터에는 호종단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중국의 명나라 지관이었던 호종단이 '제주에 인물이 날 수 없도록 맥을 끊으라'는 명나라 왕의 명을 받들고 제주로 들어왔다.

호종단은 제주에서 지맥을 살피며 맥을 끊는 중 의귀리 인근 수망리 마을에서 경주김씨 김이홍과 연을 맺게 되었다.

김이홍이 천운을 타고 난 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호종단은 김이홍에게 지금의 의귀리에 집터를 정해 주어 살게 했다.

그리하여 의귀리 마을이 설촌된 것이다. 의귀리로 이주해 온 김이홍은 명종 5년(1550)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낳은 아들이 김만일이다.

어떤 기록에는 제주목사가 이 일대를 지나다가 김이홍에게 집터를 정해줬다고도 한다.(http://media.daum.net/culture/)


호종단은 실재 인물로 원래 송나라 사람이며 고려에 귀화하여 예종의 신임을 받았던 관리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인 1500년대에 호종단이 김이홍과 만났다는 이야기는 100% 허구이다. 오히려 '어떤 목사' 혹은 '신안을 가진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서에 호종단이 제주에 왔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제주에 왔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김만일 당시의 집은 없어졌으나 위 사진 잇돌은 김만일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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