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진사 김석린의 물통..우도 조일리 진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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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진사 김석린의 물통..우도 조일리 진사통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18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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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생활을 위해 자신의 집 근처에 외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아 단 한 가호만 살았다

조일리 진사통

위치 ; 우도면 조일리 영일동에서 서광리 중앙동으로 가는 길가 남쪽
유형 ; 수리시설(음용수)
시대 ; 조선

 

조선 숙종23년(1679) 목장이 설치되면서 국마를 관리·사육하기 위해 사람들이 빈번히 왕래하기는 했지만 우도에 사람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43년 조선 헌종9년부터라고 생각된다.

순조23년(1823)부터 제주 백성들이 계속하여 조정에 우도 개간을 허락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1842년 조정의 승인을 받았고 그 다음해 봄에 방목하던 마필을 다른 목장으로 반출하고 나서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이다.


진사 김석린(金錫麟)은 제주 성내인으로 순조조에 초시에 합격 진사가 된 후 1844년 우도에 입주 정착하여 이 섬에 훈학을 개설하고 우도민의 훈학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신 분이다.

김석린은 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서울의 신판관 딸과의 연정이 있어 그 여인에게 태기가 있자 대과를 포기하고 낙향하였는데 그에게는 이미 제주성 밖 동광양에 처자가 있었다.


마침 그 무렵인 1842년 우도 기경을 조정에서 허가하자 1844년 김진사는 신씨부인과 함께 우도에 들어와 이곳을 개척하며 훈학에 힘썼으며 주민들을 계도하고 정착생활을 도왔다.

한편, 과중한 세금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감면하여 주는 등 섬 주민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고 한다. 서광리 충혼묘지 북쪽에 그를 위한 유애비가 세워져 있다.


김진사는 우도에 입주한 후 기존의 이주민들과 인접하여 생활하는 것을 피해 영일동 후편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하였으며 은거생활을 위해 자신의 집 근처에 외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아 단 한 가호만이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음료수통을 파서 물을 받아 마셨다고 하는 물통을 '진사통'이라고 하며, 지금도 진사통 옆의 밭을 ' 밭(딴밭)'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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