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해녀항일투쟁 뒷받침..오봉리 강관순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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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해녀항일투쟁 뒷받침..오봉리 강관순생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20 0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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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출신,申才弘, 金聖五와 더불어 '牛島3大天才'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오봉리 강관순생가

위치 ; 우도면 오봉리 전흘동 929번지
유형 ; 건물(독립투사)
시대 ; 일본강점기

 

 


康寬順은 1909년 북제주군 구좌읍 연평리 929번지에서 태어났다. 申才弘, 金聖五와 더불어 '牛島3大天才'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당시 연평리 전흘동 출신으로 영명의숙(永明義塾) 4년 과정을 졸업하고, 1926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영명의숙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야학에서 문맹 퇴치 운동을 하였다.

문학적인 소질이 있어 필명을 '康哲'이라 하여 문예활동을 했고 각본을 직접 지어 소인극(素人劇)을 연출하기도 했으며 구속 당시에는 신문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1931년 3월 조선공산당원 신재홍(申才弘)·오문규(吳文奎)·문도배(文道培)·김시곤(金時坤)·김성오(金聲五) 등과 함께 사회주의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결성에 참여하여 청년부 책임을 맡았다.

이 조직을 우도에서도 결성하였는데 신재홍(1932년 당시 32세)이 책임자가 되고 강관순(25세)은 연락부를, 김성오(21세)는 청년부를 맡았다.

또한 고자화(高子華), 고원한(高元瀚), 우봉준(禹奉俊) 등과 함께 야학소를 만들어 주민 남녀 문맹자에게 한글, 천자문, 산술 등을 가르치며 은연히 민족주의 이념을 가르쳤다.


1931년 6월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하였다.

또한 김성오와 함께 고자화(高子華) 집에서 고봉준(高奉俊)·고원한(高元瀚)과 회합하여 적(赤)이라는 당외 기관을 만들었다. 당시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을 맡았다.


1932년 1월부터 구좌읍에서 해녀항쟁이 일어났는데 강관순은 이 제주해녀항일투쟁을 뒷받침했던 사람이다.

해녀항쟁으로 비밀 결사가 탄로되어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된 인물은 강관순을 비롯하여 김성오·신재홍·우봉준(禹奉俊)·이두삼(李斗三)·고자화·정찬식(鄭贊植)·공덕봉(孔德奉)·고기창(高基昌)·강희준(姜熙俊)·양봉윤(梁奉潤)·윤대홍(尹大弘) 등이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강순원)


이 사건으로 그는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는 은밀히 「해녀의 노래」 가사를 지어 면회온 사람에게 주어 보내었다고 한다.(곡은 '東京行進曲'을 차용했다는 점이 다소 아쉽다.)

「해녀의 노래」는 항일 운동가(運動歌)로 널리 불리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 전역과 다른 지방에 나간 해녀들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복역을 마친 후에는 귀향하여 영명의숙 교사로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러나 일제당국의 미행과 감시가 심해지자 부부가 함께 함경북도 청진으로 떠났다.

나중에 청진으로 따라간 김성오와 함께 원산에서 시행한 항해사 을종 시험에 나란히 합격하기도 했다.(강관순은 건강 문제로 항해활동을 포기했으나 김성오는 항해사로 명성을 날렸으며 조국 해방 후에는 부산에 거주하며 일류 선장으로 전국에 알려졌었다.)


만주 간도 지방을 드나들며 큰 뜻을 펼치려 했던 차에 일경의 모진 고문에서 얻은 형독(刑毒)과 옥중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1942년 여름 34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청진에서 남편의 시신을 옮겨 고향 우도봉에 안치시킨 부인 김유생(金有生) 여사는 후일 유복녀(강길녀, 1996년 55세, 우도면 천진리 거주)를 낳았다.


강관순의 부인은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에 대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1930년대 도내 항일투사들이 우도에서 회합을 자주 가졌는데 우도를 회합 장소로 택한 이유는 우도가 은밀한 장소로 일제당국의 눈을 피하기 쉽고 이들의 수장(首長)인 신재홍이 우도에 살고 있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셋째 이유는 강관순의 부인이 정성을 다하여 이들을 접대해 주는 데 모두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5년 3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우도의 선착장에 시비(詩碑) 「해녀의 노래」가 건립되었다.

묘는 2010년 10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으며 비석 아래 받침돌에는 해녀가를 새겼다.

《작성 070828, 수정보완 1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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