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봉개리 초토화 이후 선무공작..봉개동 마을방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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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봉개리 초토화 이후 선무공작..봉개동 마을방어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12.21 15: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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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20일경 이날 동부8리에서 피해를 입지 않는 곳은 없었다."

봉개동 마을방어성

 

위치 ; 제주시 봉개동 대기고등학교 정문 앞 좁은 길 들어가서 오른쪽 20m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2층 벽돌기와집에서 왼쪽으로 30여m 앞에 있는 과수원 안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

 

 

봉개리는 제주시 동부 중산간마을의 중심에 놓여있다. 밭농사와 특히 목축이 발달했던 이 곳 동쪽 동네를 '처낭가름(진목동)'이라 하고 서쪽 동네인 '큰동네(대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와 함께 '명도암', '도고내가름' 등 크고 작은 자연마을들이 봉개리를 이루고 있었다.


1948년 11월 20일경 봉개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오갈 데 없는 주민들이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일부 화북, 삼양 등 해변마을로 피난간 주민들도 '산간 사람은 다 죽인다'는 소문과 해변마을을 습격한 무장대의 인솔에 따라 다시 산간으로 올라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낮에는 야산에서 밤에는 불타버린 집에서의 생활을 반복하던 봉개리 주민들은 1949년 2월 4일 군경대 토벌로 대거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가서 또 많은 주민들이 쫓기다 죽어갔다.


동산가름과 도롱쿨 등 10호 미만의 마을이 있었으나 4 3 이후 폐동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에 일본군이 주둔하며 갱도진지를 파놓았는데 4 3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 군인들이 굴 파놓은 대나오름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곳에 있던 사람들도 여기서 우리들과 합류하였다.

우리 일행은 백여명으로 불었다. 굴이 두개였기 때문에 잠자리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의식문제는 딱하기만 했다. 토벌은 점점 치열해져서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이제 대나오름도 점점 위험을 느껴 낮에는 밥을 만들어서 지고, 산위에나 다른 먼 곳으로 피신했다가 저녁이면 돌아오곤 했다.

이제는 마을에 젊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날의 대토벌은 숨었던 모든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남은 것은 늙은이와 아이와 여자들뿐이었다. 대나오름 굴에 있는 사람들도 위험을 느껴 더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날 동부8리에서 피해를 입지 않는 곳은 없었다."


지난 1964년 경향신문 신춘수기에 당선된 봉개동 출신 임두홍씨의 체험수기다.


이날 벌어진 제주읍 동부8리 대토벌은 수백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아갔다. 주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과 오름, 굴 등지로 숨어들었으나 토벌대는 그들을 찾아내 무차별 학살하고만 것이다.


1949년 2월 4일 제주시 동부8리 대토벌은 봉개리를 포함하여 인근 마을인 회천, 용강 사람들에는 엄청난 인명피해로 인해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의 상황에 대해 국방부는 "상오 3시를 기하여 제주읍 봉개지구에서 함병선 연대장 지휘하에 육해공군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다"면서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 식량 의류 등 다수 압수"라는 전과를 발표했다.

이날의 무차별 토벌은 비행기와 로케트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기총소사까지 감행한 양민학살의 전형이었다.


죽성주둔부대, 함덕 2연대, 삼양지서와 민보단 등의 동서남북으로 포위하며 토끼몰이식으로 주민들을 몰아 넣어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360명을 사살하고 130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압수품이 총기는 한 정도 없고 고작 식량과 의류라는 것은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다"는 발표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말해준다.


봉개리는 제2대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을 지낸 김용관 등 '봉개7인당파'(좌익활동을 주도적으로 한 사람들을 일컬어 주민들이 붙인 말. 김용관, 김응배, 이순진, 현갑생, 강응추, 임태종, 김영순)를 중심으로 교육사업도 했으나, 토벌이 강화되면서 그들을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봉개리 초토화 이후 삼양, 화북 등지로 피난갔던 봉개리 주민들은 1949년 7월 재건 명령에 따라 서부락을 에워싸는 축성을 한 후 성안에 함바집을 짓고 살았다.

봉개리 재건은 소개당한 마을 중에 처음으로 복구가 이뤄져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다뤄졌고, 제2연대의 주민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이것은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이 4 3 진압작전을 마치고 해안지대로 소개했던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특히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하였다.

봉개동의 마을성담은 현재의 봉개초등학교 서쪽 길에서 대기고등학교 앞길까지 직사각형 모양으로 쌓았었다.

봉개초등학교 정문 앞에 東門, 2452번지 부근에 西門, 용강에서 들어오는 길목에 南門, 아봉로 북쪽 끝 부분에 北門이 설치되었었다.

성의 동남쪽 모서리에서 1920번지까지는 성밖에 해당되는 곳인데 성담을 양쪽으로 쌓아 교통호처럼 만들고 그 끝(1920번지)에 초소를 설치하는 특이한 구조였다. 성담 안에는 30평씩 땅을 나누어 귀향민들이 살도록 했다.(1935년생 임홍종씨 2010년 9월 23일 증언)


성안에는 십자로(十字路)를 새로 뚫어 십자로 사방으로 함바집을 짓게 했다. 지금도 그 십자로의 길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국에선 일부 건축자재를 보조하거나 벌채를 허가해 복구를 돕기도 했다.(한라일보 2008년 5월 20일)


봉개동에는 이 당시 쌓은 마을방어성이 많이 훼손되어 성벽의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지만 현재까지도 20여m 남아있다.

성은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의 북쪽 2층벽돌기와집 앞 도로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남아 있었으나 이 부분은 2,3년 전 길을 확장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남아 있는 부분은 성담 전체에서 보면 서남쪽 끝부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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