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는, 제주를 직접 보는 현장의 실상이며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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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는, 제주를 직접 보는 현장의 실상이며 역사다."
  • 고현준
  • 승인 2020.01.04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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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7코스, 광령1리-이호해수욕장 복잡한 인간사 근심 없애는 '무수의 길'

 

 

2019년 12월28일은 이 해의 마지막 송년올레걷기에 나선 날이었다.

지난 해 2월2일 3코스부터 시작했던 하프올레걷기는 이날 17코스 하프코스를 걷는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다.

2월에 서귀포시 신산리 마을카페 앞에서 오태권, 고광언과 셋이 처음 출발한 후 12월 말, 11개월 만에 드디어 제주시 중심으로 들어가는 하프코스까지 온 것이다.

올레꾼 고광언과 함께 우리는 조금 늦은 시간인 12시 03분에 광령1리 사무소 앞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이날 이호해수욕장까지 걸어 송년걷기를 마무리한 시간은 14시24분이었다.

17코스 출발점이 있는 광령1리는 어떤 마을일까.

 

 

광령1리 마을약사

 

설촌 당시부터 불리워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광령'이란 리명은 언제, 어떻게, 누가 명명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광령이란 이름이 정사에 기록되기는 1653년(효종 4) 목사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가 최초이다.

당시에는 분명히 광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과원」편에 '제주서남 이십리에 유자 80주, 산귤1주, 신제각과 39주, 닥나무 372주, 칠나무 145주, 동백 1주, 뽕나무 8주, 느티나무 1주가 있다'고 적혀있다. 또한 1725년(영조1년)에 받은 고씨가문 교지에 의하면 다시 광영으로 리명이 다르게 표기되고 있다.

이렇듯 靈(영)자가 映(영)자, 令(령)자로 바꿔지며 오늘에 이른 것은 이 세글자가 서로 뜻이 통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 이름이 지금의 광령으로 굳어진 동기는 기록의 편의상 그렇게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령 산칠성, 무칠성형으로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아 산주수청하니 광이요, 백성의 민속이 밝고 선량하니 令(령)이라 했다고 한다.

즉 산이 아름답다 하여 '큰수덕' '정연동산' '서절굴동산' '무녀마를'이 칠성의 앞 사성을 이루고, '엄지굴동산' '테우리동산' '높은욱대물', '절물', '자중동물', '독지굴물', '행중이물', '셈이마를물' 이렇게 샘물도 칠성형으로 이루어져 광령마을이 되었다.

따라서 광령1리의 리명은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속칭이 전혀없이 단일명으로만 쭉 불리워 온 특징을 갖는다.(광령1리 홈페이지 발췌)

 

 

광령1리사무소에서 시작해 무수천으로 향하는 길은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여 이 길을 예쁘게 만드는 꽃길인데, 이 날은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길은 황량하기만 했다.

하지만 대로변을 따라가다 무수천이 이어지는 길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아주 깊고 길게 늘어선 대단한 계곡이 바닷가까지 이어져 함께 했기 때문이다.

17코스 하프코스 초반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웅장한 무수천은 외도동 월대천을 지나 바다까지 이어지는 대단한 계곡이었다.

이 계곡에는 거대한 용암이 흘러간 흔적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다.

그동안 누군가가 이 아름다운 계곡을 부수고 많이 없어지게도 만들었지만 아직 그 거대한 계곡의 위용은 그대로다.

그러나 계곡 옆은 누군가 버린 쓰레기가 가득 했다.

 

 

 

 

무수천에 대해

 

복잡한 인간사의 근심을 없애준다는 이름의 개울이다.

한라산 장구목 서복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25킬로미터를 흘러 외도동 앞바다까지 이어진다. 수량이 풍부해 제주시의 주요 수원이기도 하다는 올레안내판이 입구에 서 있었다.

 

 

 

계곡이라 그런지 오래된 나무 위로는 덩굴이 가득 둘러싸고 있었다.

비라도 많이 네리는 날은 아마 그 나무위 까지도 물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심한 사람들은 이 나무들이 이와 같은 덩굴에 의해 죽어가는 줄도 모를 것이다.

덩굴나무 중에는 나무의 수액을 빨아들여 나무를 고사하게 만드는 종류도 많은데..이곳은 이런 덩굴들의 습격에는 아예 손을 놓은 모습이다.

비라도 내릴 때면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흘러내리기도 했을 이 계곡은 그래서 그런 지 곳곳에 물 웅덩이가 많이 고여 있었다.

 

 

무수천을 거의 다 내려와 어느 다리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얼마나 물살이 셌던지 시멘트로 만들었던 길이 모두 무너져 내려 사라지고 없었다.

과연 제주가 자랑할 만한 웅장한 계곡이지만, 이 계곡을 빛내는 어떤 안내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었다.

안내판 하나 없는 무수천 계곡..

자연은 이렇게 말없이 존재할 뿐이다.

마치 동백꽃이 길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동백의 존재를 나타내듯이..

 

 

계곡은 그렇게 말없이 그 거대하고 남아 장구한 세월을 견뎠으련만 무심한 우리 눈에는 그저 돌덩어리로만 보일 지도 모른다.

행여 하는 마음에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올레17코스를 걷는 내내 유심히 보았지만, 그 계곡에 대해 소개한 내용은 올레안내판 외에는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아름다움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계곡을 다 걸어 나와 대로변을 따라 걷다 외도 월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감귤 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손에 귤을 들고 있다가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졌다.

 

 

 

그동안 많이 했던 익숙한 일인 듯 아무 말도 없이 손으로 건네는 감귤이었다.

우리는 하나씩 받아들고 맛있게 먹으며 잠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올레를 걷다보면 가끔 이런 분들과 만난다.

말없이 감귤을 건네시기도 하지만 드시고 가라고 권하기도 한다,

모두 제주를 빛내는 고마운 분들이다.

월대천 위쪽에 도착했을 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공사 중이었던 외도 제2축구장과 만났다.

이곳에서 많은 주민들이 즐겁게 축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또 곳곳에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안내판이 많았다.

 

하지만 그 한 안내판 옆에는 쓰레기가 가득이었다.

앞뒤가 안 맞는 일은 어디서나 목격한다.

월대천에 이르자, 각종 새들이 물위에 가득 앉아 있었다.

처음에 만난 새는 원앙이었다.

 

 

기러기도 가득 물 위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두루미와 재두루미도 언제나 자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은어와 장어가 산다는 월대천은 지금 생태계가 제대로 유지되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양한 새들이 평화로운 월대천은 그 자체로 아름답기만 했다.

월대로 들어서자 이곳은 외도가 자랑하는 수백년된 소나무와 함께 품위를 더했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라서 그런지 찰랑거리는 물결이 운치를 더 한다.

 

 

 

월대

월대는 외도초등학교 동북쪽 외도천변에 인접해 있는 평평한 대를 일컫는다.

도근천과 외도천이 합류하는 곳 가까이에 있으며 주위에는 5백 여년 된 팽나무와 해송이 외도천 위로 휘늘어져 있어 경관이 좋은 곳이다.

지형이 반달과 같은 곳으로 옛날부터 밝은 달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서 물위에 비치는 달빛이 장관이었다.

마을에서는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동쪽 숲 사이로 떠오르는 달이 맑은 물가에 비쳐 밝은 달 그림자를 드리운 장관을 구경하며 즐기던 누대라는 뜻에서 월대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고 시문을 읊던 곳으로 유명하다.

월대천은 월대 앞을 흐르는 외도천을 달리 일컫는 말로 월대 인근에서 흐른다고 해서 월대천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물이 깊고 맑으며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으로 뱀장어와 은어가 많이 서식한다는 월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어 이해하기 좋았다.

 

 

월대에서 바닷가 쪽으로 나오자 외도물길 20리와 함께 외도8경이라는 노란 안내판이 하나 서 있었다.

외도 물길 20리는 외도동의 자연 · 역사 · 문화를 널리 알리고 명품도보 여행지로 지역 명소화 함으로써 관광객 유치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탐방코스는 총구간거리 약 8km (2시간 ~ 2시간 30분 소요)로 월대천출발 → 알작지 → 내도청보리밭 → 도근천 남쪽길 → 월대천공원 → 월대교 → 외도생태공원경유 → 납세미물 → 외도동주민센터 → 연대 마이못 → 해양수산연구소 북쪽 산책로 → 월대 바닷가 → 월대천 도착하는 코스다.

 

외도팔경

 

월대피서(월대에서의 피서),

야소상춘(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마지약어(마지(연대입구 마지못)에 뛰는 물고기),

우령특송(우왓동산의 큰나무),

대포귀범(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광탄채조(넓은 여에서 해조 캐는 모습),

사수도화(절물 벼밭에 벼꽃 핀 모습),

병암어화(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월대가 월대인 것은 이곳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더 빛내는 수백년 이상의 수령을 지닌 소나무들이다.

이들 거대한 소나무 앞에는 모두 수령 250년 보호수라는 팻말을 붙여 잘 보호하고 있었다.

이 팻말을 만든 해를 포함하면 거의 3백년은 족히 된 소나무들이다.

바닷가로 나오는데 바닷가 쪽에도 물 위에는 많은 새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월대도 선경이고 이들 새들이 바다에 앉은 모습도 선경이다.

 

올레길은 외도와 내도를 잇는 다리를 지나 길은 내도로 안내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해안도로 공사로 정신이 없었던 내도는 이제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바다를 향해 식당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고 알작지 앞은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동네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지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식당도 이 지역 개발 때문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알작지는 그대로 남았지만 내도는 제주시 서쪽에 위치한 새로운 해안가마을로 자리잡아가는 증이었다.

 

 

 

그래도 아직 자연포구였던 암맥군이나 알작지가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올레꾼 2명은 이호해수욕장이 보이자 그 입구에서 걷기를 멈췄다.

다음에 가야 하는 길이 제주시내 중심가였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도두봉을 오르고 해안도로를 거쳐 제주시내 중앙로 올레안내소까지 가야 한다.

매주 토요일이면 하프올레걷기에 나선 1년.

그래도 지난 1년간 3코스부터 17코스의 하프코스까지 걸었다.

 

 

아주 더운 여름이나 아주 추운 겨울은 피해 몇 개월을 쉬다보면 하프올레 걷기로 제주올레를 다 걸으려면 2년 정도는 잡아야 한다.

하지만 올해는 난전 강법선 선생과 친구 고광언이 올레꾼으로 나서면서 별로 쉬는 날이 없었다.

꾸준히 주말이면 떠나는 올레길은 건강을 위해 매주 걷는다는 의미 외에도 성취감까지 주면서 올레를 사랑하게 만든다.

과연, 올레길이 없었다면 제주도를 누구나가 다 돌아볼 기회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올레를 세 번째 걸으면서 매년 바뀌어가는 제주를 바라보는 일도 사실 소중한 경험이다.

그렇게 제주도는 가는 곳곳 갈 때마다, 조금씩 매년 바뀌어 가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보는 사진들이 예전의 모습이 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제주올레는, 제주를 직접 바라보는 현장의 눈이고 실상이며 역사다.

 

 

 

 

올레꾼 고광언

 

 

 

 

 

 

(지난 1년간 제주올레 탐방기를 사랑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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