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1949년 초에 쌓은 외성의 흔적..회수동 북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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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1949년 초에 쌓은 외성의 흔적..회수동 북문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04 0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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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회수교회 울담으로 사용되고 있다.

회수동 북문성
 

위치 ; 서귀포시 회수동 285-1번지 일대 회수교회의 울담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

 

 



1948년 말에 접어들자 토벌대의 인민유격대에 대한 작전이 강경해지면서 그들의 보급 루트가 된다고 생각하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작전을 시행하였다.

그와 병행하여 해안 마을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는 목적으로 마을을 둘러싸는 성을 쌓도록 한 것이다.

성을 쌓는 일에는 물론 주민들이 동원되었으며 성을 쌓은 후에는 보초 경계 근무 또한 주민들의 몫이었다.

4·3 당시 이곳에 북문이 있었으므로 '북문성'이라 한다. 길이 70m, 높이 2~3.5m, 폭 1~1.5m로 보존 상태가 좋다.


4·3 당시 중문면 회수리(廻水里)는 ‘도래물(도리에물)’이라고 부른다. 당시 약 60호 정도의 마을이었고 인근에는 대포리에 속한 ‘동수동’(약 20호)과 ‘어둔마루’(약 10호)가 있었다.

1948년 11월 중순 초토화시기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동수동 주민들은 회수리로 소개해 회수리와 한 마을이 되었고, 어둔마루 주민들은 대포리에 속하게 되었다. 회수리는 중산간마을이면서도 소개되지는 않았다.


회수리 북문성은 1949년 초에 쌓았던 외성의 흔적이다. 이미 회수리로 소개해 있던 동수동 주민들도 같이 성을 쌓았다. 그 후 회수리에는 토벌대인 ‘신선부대’ 1개 소대가 한 동안 주둔하기도 했다.

경찰은 1950년 8월 의용경찰대와 향토자위대를 조직하여 경찰 업무를 보조하도록 하면서 신선대와 맹호대 등 2개 부대를 편성운영하였는데 신선대 일부 병력이 회수리에 주둔했었다.


신선대에 대해 이상하(남, 2003년 68세)씨는 ‘신선대가 있을 때에는 이미 산이 약해질 때였어요. 그 사람들은 맨날 토벌간다고 나가서 마을에는 몇 명 있지도 않았죠. 소대 병력 정도 되었어요. 부인회장네 집이 크고 밖거리도 있어서 그곳에 살았고 다른 집에도 나누어 살았어요.’라고 증언하였다.

당시 부인회장댁은 현재의 이평조씨 집이다. 올레에는 군인들이 보초를 섰다고 한다.

회수리 주민들은 신선대 주둔에 대해 토벌대의 뒷바라지 때문에 괴로운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여겨 더 협조했다고 한다.


이곳에 북문이 있었으므로 ‘북문성’이라 부른다. 현재 회수교회 울담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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