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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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 고현준
  • 승인 2020.01.06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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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산책)법정스님이 걷던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길 따라 걸으며..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법정스님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송광사 무소유길은 법정스님이 기거하던 불일암으로 오르는 길을 말한다.

이 무소유길을 오르는 동안 중간중간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글귀들이 무소유길의 의미를 마음과 함께 대신 전해준다.

 

 

불일암

송광사 불일암 무소유길은 법정스님께서 자주 걸으셨던 길로, 대나무 숲을 비롯하여 아름드리 삼나무, 편백나무,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식물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숲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천천히 따라가면 불일암에 다다른다.

불일암에는 평소 무소유를 실천하셨던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아래 유골이 모셔져 있어 스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남 순천 송광사 입구에는 불일암으로 올라 가는 무소유길 외에도 고향수라는 고목이 이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하나 우뚝 서 있다.

 

고향수는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께서 심은 나무로 입적하시기 전에 자신의 불멸을 입증하고자 한 나무이다. 높게 솟아있는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있다.

 

과연 우리나라 삼대사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송광사라는 거대한 가람이 아름다운 조계산 기슭에 이 절의 역사와 함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명상은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끓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깃들게 된다

-법정스님 ‘오두막편지’ 중에서

 

 

불일암을 오르는 길에 나타나는 이 고운 글귀들은 모두 법정스님의 글을 옯겨 적어놓은 것이다.

송광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조그만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면 불일암에 다다르지만 무소유길이라는 이름의 이 길은 법정스님이 이곳에 기거하실 때 자주 걸었다는 그 말 만으로도 걷는 내내 무소유길이라는 글귀들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법정스님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불일암을 오르는 30여분 오르며 걷는 중간 쯤 나무로 만들어진 긴 의자가 하나 씩 놓여 있다가 거의 다 올라가서는 힘에 겨운 사람들 몇이서 같이 앉으라는 뜻인지 나무의자가 2개 씩 함께 놓여 있었다.

드디어, 불일암을 앞두고 나타난 이 암자의 상징이기도 한 거대한 대나무숲..

이 당당하게 솟은 대나무숲이 걷는 이를 압도하며 불일암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불일암은 오후 4시까지만 일반인의 입장을 허용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고 나지막한 대문이 닫힌다.

그러나 어쩌랴, 다음에 한번 더 올라오라는 뜻임을..

몇 번은 더 가야 그의 숨결이라도 느낄 수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불일암을 내려오는 내리막 길은 오를 때보다 어떻게 올랐나 할 정도로 더욱 가파른 길이다.

꾸역꾸역 편백과 소나무숲이 우거진 길을 걸어 내려오다 보면 다시 송광사 입구와 만난다.

조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중의 하나이지만 그렇게 불일암이 또 하나 더 있어 이 절을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서울 길상사의 길상화 보살과 10년간 이어진 시주와 거절에 대한 두 분의 대화가 지금도 회자되는 가운데,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그의 삶과 그의 글과 함께 불일암으로 가는 그 무소유길에 그대로 녹아있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젖게 한다.

 

 

 

송광사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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