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대정현 성황사..고산1리 차귀당(당목잇당, 본향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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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대정현 성황사..고산1리 차귀당(당목잇당, 본향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09 0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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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주워온 상자 속에서 나온 뱀신을 인격화시켜 '할망'(할머니)으로 모셨다

고산1리 차귀당(당목잇당, 본향당)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당산봉 남쪽 일주도로 붙은 밭
분류 ; 민속신앙
시대 ; 조선


 

 

 

이 당은 옛적부터 대정현 성황사(城隍祠)인 차귀당으로 뱀 귀신을 모셔 제사하던 곳이다. 제주 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신당이며 고산리 본향이다. 당 이름은 '당목잇당'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법서용궁또'이다.


이 당은 옛날 '법성'이라는 한 목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법성'이 어느날 바닷가에서 주워온 상자 속에서 나온 뱀신을 인격화시켜 '할망'(할머니)으로 모셨다는 이곳의 본풀이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차귀’라는 글자는 사귀의 오전이라고 하면서 “이 지방에 뱀과 지네가 많으며,만약 회색뱀을 보게 되면 즉시 차귀신으로 간주하여 죽이는 것을 금한다.”고 적혀 있다.(제주의소리 장혜련) 그러나 필자는 '차귀'가 '사귀'의 오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종단의 지맥단절 신화에 나오는 '차귀'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성황신은 중국에서도 마을신으로 모셔졌었다. 토속신앙에서는 '서낭당', '산신당'이라고도 불려졌으며 사직단, 성황당, 여단(여壇)을 삼단(三壇)이라 하며 조정에서는 각 군현에 이를 세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대정현에서는 조정의 지시로 성황사를 새로 짓지 않고 차귀당으로 대신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기와 파편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서 관리하는 성황당이었으므로 기와집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의식은 유교적이 아닌 무속적인 굿이었다.

입춘굿이 목사 이하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심방의 굿으로 진행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당은 이형상 목사에 의해 소각되고 또 수년이 지나 복원되어 지내다가 고종19년(1882)에 마지막으로 훼철되었었다.(현지 표석)


예덕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가 당집 주변을 감싸고 있으며 스레트 지붕은 낡아서 부서졌다. 내부는 단일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직선 2단으로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제단 위에는 오석으로 만든 위패가 있는데 가운데 〈高山本鄕男七星大神〉좌측으로 작게 〈丁亥生 朱鍾根 弟子 天大目望普薩〉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담으로 된 벽에는 다소간의 지전·물색·명실이 걸려 있다. 제일은 '1월 새철들엉 첫 쇠(牛)날'.


〈본풀이①〉옛날 고레적에 차귓벵디에서 '법성이'옌 하는 테우리가 마소 멕이단 해풍(海風)하러 갯가에 내려갔수다. 내려간 보난 어떤 이상한 무쇠설칵이 올라왔수다. 법성인 '이게 뭔곤?' 몰란 그 무쇠설칵을 개맡디에 가져단 열어 보았수다.

그렇게 하니 그 쏘곱엔 황구렝이 한 쌍, 적구렝이 한 쌍이 소랑소랑 사려져두서 눈은 햇득 세는 멜록. 금착했수다. 법성인 '과연 잘못했수다. 살려 줍서. 나에 태운 조상님이건 존 딜로 강 점제(定座)하시면 제를 지내쿠다.' 하니 그게 법성이 조롬에 조차오란.

이젠 당오름 펭풍기정으로 해서 쟁길처 존 딜로 오란 좌정하니 당설립이 되었수다. 이 조상은 영급좋고, 수덕좋고, 버네 좋앙 자손들이 日本 대판(오사카) 하근디 세계 각국을 가도 멩심만 하면 멩심덕이 시영 멩광 복을 주곡 잘 그늘롸주는 영급높은 조상이우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 당목일 넘어가려면 하매(下馬)해야 하고 머리라도 속곡해서 넘어가사 합네다. 그영 아니하면 말발이 절곡, 통대(담뱃대) 문 양 넘어가당은 니빨 알리곡 합네다. 옛날 호열자가 들언 우리 지주섬에 널어지연 사름 하영 죽어갈 때에도 우리 차귀마을은 이 조상이 도외연 호열자가 곳딱 못 들게 막아 주었수다.


그렇게 했는데 해방 후제 사삼사건이 터지연 마을 청년회가 조직되고 이완노가 회장이 되었는디 하루는 이완노가 '이거 다 씰 디 없다' 해서 이 당을 모두 부시닥질하고 당폭낭도 그차부렀수다.

그영허난 그 죄로 이완논 율단 죽고 마을에서도 이력이 잘 되질 아니했수다. 그르후제 마을부녀회에서 '이 조상을 잘 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키옌' 해서 이 당을 잘 손보고 공그리로 곱게 단장을 하였수다. 그렇게 하니 자손덜 이력도 잘 되고 마을이 펜안했수다.
영급 씨고 수덕 좋은 축일본향할으바님 상 받읍서.(무가본풀이사전 553~554쪽)


〈본풀이②〉당목잇당 본향한집님은 사해용궁또 법사용궁 할으방이우다. 옛날 법성이란 이가 검은여로 해풍하러 갔단 보니 난디엇인 무쇠설갑이 올라오란 '이 쏘곱에 은이 들어신가, 금이 들어신가?' 하고 지여단 저 당오름 펭풍기정으로 쟁길처(淨潔處) 존 딜로 몇날며칠을 놔두어봐야 열 수가 없어.

하루날은 황구도치로 '이게 뭔곤?' 법성이가 깨집으난 깃발(이빨) 벌린 용궁(뱀)이 들어 있구나. '아이구 잘못했수다. 귀신이우꽈, 생인이우꽈?' 허배를 한다. 동의와당 청룡머리, 서의와당 백룡머리 짓벌겅한 황구렝이가 나오니, 낭도 음접(陰接) 물도 음접, 호적 차지, 장적 차지, 마을차지, 민(面)차지, 내 차지라.


마상(馬上)이나, 신랑이나, 신부가 넘어가젱 해도 말발이 절엉 못 넘어가곡, 하근 사또가 넘어가젱 해도 그냥은 몸이 아팡 못 넘어가니, 이 당 앞을 넘젱 하면 하맬하곡 대갱이라도 속곡 해서 절을 해야 無事히 넘어가곡 하니 민(面) 차지 마을 차지한 토지본향한집으로 좌정하였수다. 이 당 법성용궁할으방은 또시 신창, 검은 들광 용수 곳새왓으로 가지갈라간 삼본향한집이 됩니다.(무가본풀이사전 551쪽)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는“봄과 가을에 광양당과 차귀당에 남녀가 모여 주육을 갖추어 신에게 제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국당이었던 광양당과 견줄 만큼 위력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쇠락하고 퇴색되어 갔다.

더욱이 제주4·3사건 당시 마을 청년회장이 당을 부수고 신목을 베어버렸다 한다. 일주도로변 두어 평 남짓한 철골구조물의 당집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2009년 8월 현재 당집 지붕을 해체하고 기와로 올렸으며 제단도 나무로 하여 새롭게 단장 중이다.

주변에 풀이 우거져 음습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을 정리하고 당으로 가는 길도 시멘트로 포장되었다.(제주의소리 장혜련)
《작성 080809, 보완 1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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