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연디뱅디'..위미1리 우미연대(멸실)터
상태바
[향토문화]'연디뱅디'..위미1리 우미연대(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10 0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개인주택이 들어서 있다

위미1리 우미연대(멸실)터
 

위치 : 남원읍 위미리 2877번지 위미1리 위미출장소 북쪽 150m 지점
유형 ; 방어유적
시대 ; 조선

 

 



연대는 옛날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방호소나 수전소 등 군대가 주둔한 곳에 연락을 취했던 통신망의 하나이다.

연대는 바닷가의 높은 지대에 석축 사면으로 쌓았고 상단 중앙에 대(봉덕)를 만들어 사용했었다.

봉수와 연대는 각각 별도로 했는데 평상시 1개, 황당선 출현 2개, 근경에 이르면 3개, 犯境이면 4개, 접전할 때 5개의 연기 또는 불꽃을 피워 연락했다.

연대의 규모는 높이 4m, 가로 8m, 세로 10m로 여기에는 별장 6인과 망지기 12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우미(又尾, 又美, 爲美)연대는 서귀진 소속이었다. 남원읍 위미1리 2877번지 위미1리 위미출장소 북쪽 150m 지점에 있었다. 남원읍 위미출장소 뒤편 일대의 '연디뱅디'라 불리는 곳으로 지금은 과수원이 조성되기도 하고 주택도 들어섰다.


위미리 해안(포구)과는 175m 거리이다. 지형상으로는 만(灣, 포구)의 안쪽이어서 멀리 조망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편이나 주변보다 높은 언덕이어서 연대의 기능에는 별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우미(又尾)연대는 탐라방영총람(1760년대)에 처음 나오는데 1790년의 제주대정정의읍지에는 위미(爲美)연대, 다시 1899년의 정의군읍지에는 우미(又美)연대로 나타난다. 서쪽에는 보목연대(6.5㎞)가 있지만 예촌봉으로 가려지는 위치라서 예촌봉수대(3.6㎞)가 연결하였다.


『제주의 방어유적』에는 사진과 함께 경계석의 일부가 남아 있고 높이 0.8m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23㎝×110㎝×65㎝, 20㎝×69㎝×50㎝ 크기의 석재에 잔돌을 끼워 거친돌을 바른층에 가깝게 쌓았으며, 연대의 크기는 8.5m×9.3m가 되며 난간 폭은 1m 정도로 추정되고 입구는 폭 65㎝로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이 없다.

당시 연대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돌들이 과수원의 경계돌담으로 일부 이용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위미1리 2877번지에는 연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개인주택이 들어서 있는데 그 집 주인은 이 집터가 속칭 '연디굽'이라고 했다. 굽이란 바닥, 터, 밑, 밑둥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작성 080810, 보완 19102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