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는 자연과 나와의 치유..걸어 봐야 제주환경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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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는 자연과 나와의 치유..걸어 봐야 제주환경 지킨다”
  • 고현준
  • 승인 2020.01.1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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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7코스 이호테우해변-관덕정(중앙로 간세라운지),서로 사랑하는 '치유의 길'

 

 

지난 11일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올레길을 걷는 날이었다.

첫째 둘째 주는 2주 연속 모두 육지부 출장 때문에, 3주 만에 새해 첫 올레길 걷기에 나섰다.

이날 올레걷기의 시작은 이호테우해변에서 시작했다.

올레꾼 고광언과 함께 출발점인 이호테우헤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50분.

바람은 약간 불었지만 춥지는 않아 걷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이호테우해변은 어릴 적 시내버스를 타고 와서 많이 놀았던, 추억이 많은 곳이다.

제주시내에서는 삼양해수욕장과 이호해수욕장이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변해 버렸지만..

사람 가득한 버스를 타고 꾹꾹 눌린 사람들 사이에 끼어 기어이 해수욕장을 찾았던 기억이 새롭다.

삼양은 검은 모래가, 이호는 하얀 모래가, 어릴 적에는 그 광경이 참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 이호해수욕장의 모레는 노란색이다.

방파제와 항만 건설 등 각종 개발로 인해, 하얀 모레는 다 쓸려나가 버리고 매년 새로운 모레를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제주도의 그 아름다웠던 모레는 아닌 것이다.

그레서 그런지 이호테우헤변에는 모레가 쓸려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레 위에 덮개를 씌워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호해변의 파도는 아름답기만 하다.

더욱이 이호해변을 따라 걷는 조그만 숲길 산책길은 마음의 작은 여유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호에서 도두를 향해 걷는데 바닷가 바위 위에 가마우지가 떼를 지어 앉아 있었다.

제주에는 가마우지가 참 많다,

바닷가로 가면 어디나 가마우지가 있어 바다라는 그 분위기를 돋군다.

 

 

도두동에서 도두봉까지 가는 길..

도두봉은 별로 높지가 않아서인지 산책객들이 참 많은 곳이다.

이날 단체로 온 많은 학생들이 도두봉 정상에 올라 바다와 함께 비행기 이륙장면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정상에는 도원봉봉수대가 있었다는 표석이 하나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와 해안도로는 그 자체로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곳에 앉아 잠시 쉬고 다시 용담-도두해안도로를 따라 시내 쪽으로 걸었다.

이제부터 이 해안도로는 분위기가 제주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다는 하얀 포말과 바다를 향해 떠가는 듯 다양한 기암괴석이 포효하기 시작한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 바다는 길은 우리에게 달려와 하얀 포말로 대화를 하자고 유혹한다.

이곳에 앉은 낚시꾼 동상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해안도로.

하지만 이곳을 걸으며 보는 그 고급스런 아름다움과는 달리 해안가에는 바다쓰레기가 산더미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하며 “쓰레기섬, 쓰레기섬..” 하고 말하는 듯 했다.

 

 

 

바다색은 비취색인데..해안가에 널린 쓰레기들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반감시키는 중이었다.

곳곳에 숨겨진 해양쓰레기들이 너도 나도 밖으로 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용두암-도두해안도로는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이지만, 이처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해양쓰레기로 인해 보는 즐거움을 반은 앗아가 버린다.

드디어 17코스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있는 어영작은공원에 도착했다.

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11시44분이었다.

 

 

스탬프를 찍고 다시 걸어가는데..바다쓰레기를 치운 마대가 나타났다.

알아보니 이곳 해안도로는 오직 어영마을에서만 주민들이 적극 나서서 바다쓰레기로 더렵혀진 마을 해안을 철저히 청소한 것이었다.

고방윤 어영마을회장은 “수시로 주민들이 나서서 바다쓰레기를 치우고 있다”며 “앞으로도 해안정화 작업은 제주도를 위해 지속적으로 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도자의 의식이 마을을 바꾸는 법이라는 점을 여실이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 수고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어영마을을 지났는데.. 다시 해안가는 바다쓰레기로 가득이었다.

이에 대해 관할인 제주시 오효선 용담2동장은 “어영마을은 주민들이 다 치웠지만 나머지 구간은 행정에서 치우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올레를 걸으며 이날 깨끗하고 더러운 두 얼굴의 해안도로의 다른 사정과 만났다.

누구는 열심히 일하고 누구는 열심히 놀고 있는 것일까..

 

 

 

어영마을을 포함한 용두암-도두해안도로는 바다를 향해 밀고 나간 용암이 독특한 풍광을 만드는 곳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기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지키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 듯 하다.

바다쓰레기는 과연 누가 치워야 하는 것일까..

이곳 해안도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용암의 흐른 흔적으로 인해 해안도로를 빛나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바다를 향해 놓여있는 의자는 묘한 여유로움까지 선사한다.

그 자체가 그림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곳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름답기가 그지 없는 곳이다.

이곳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렇게 무심하게 있지는 못할 터..

그래서 어영마을 주민들의 노고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용두암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래쪽을 보니 해녀들이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자체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다가왔다.

자연이 사람을 품으면 조화를 이룬다.

용두암 해안의 이 광경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을 정도로 참 아름다웠다.

자연을 뒤로 하고 앉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평화로운 정경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마치 인간의 몸을 그대로 자연에 맡기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장엄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뒤로는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용두암이 이곳이 용두암임을 소리치는 듯 했다.

 

 

 

그렇게 용두암을 자세히 보려고, 용두암을 향해 바다로 더 내려간 사람들..

그리고 하얀 포말을 부수며 파도가 치는 바다.

용두암-도두해안도로는 그렇게 인간과 자연이 만나, 용두암 하나로 완성된다.

용두암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용연다리가 나온다.

옛날 용이 살았다는 바다와 연한 아주 거대한 고운 계곡이다.

용연에는 이날 밀물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용연을 말하는 바다의 색깔조차 화려하다.

이곳에서는 어릴 적 1단,2단..하며 10단까지 정한 높낮이가 다른 바위에 올라 차례로 바다에 뛰어들며 스스로의 용감함을 서로 뽐냈던 곳이다.

 

 

 

이곳 아래에는 암석동굴이 있었다.

출렁거리는 용연다리는 사랑을 연결해주는 다리로 아직도 이곳에는 자물쇠를 걸어놓은 시설물이 남아있다.

그리고 나타난 마을 동한두기..

이곳 용화사라는 절에는 서자복이 있다.

 

 

 

복신미륵(福神彌勒, 서자복)

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민속자료 제1호

위치 ; 제주시 용담동 385번지 해륜사 구내

시대 ; 고려

유형 ; 불교 유적(미륵신앙)

 

이 석상(石像)은 '자복(資福)' '자복미륵(資福彌勒)'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며, 그 형상이 특이할 뿐더러 제주 다공질 현무암으로 조각된, 기자신앙(祈子信仰)이 감도는 진중(珍重)한 민속자료이다.

건입동의 동자복과 용담동의 서자복은 둘 다 달걀 모양의 둥그스름하고 얌전한 얼굴에 벙거지 같은 감투를 써서 늠름히 서 있는 모습으로, 그 키는 동자복이 334cm, 서자복은 290cm이다.

어느 것이나 다 형상과 조각 수법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신기한 것은 동자복과 서자복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미륵이 민간에서 명복신(命福神)으로 숭배되고 있음은 같은데 구체적으로는 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제주시 옛지명》에는 한두기 미륵보살은 '할망'이고 건입동의 것은 '하르방'이라 한다.

동자복과 서자복은 조선시대(1700년 전후) 무속 및 불교 타파 정책에 의하여 분괴(焚壞)되면서 원래 이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서자복이 있는 자리는 해륜사(海輪寺, 일명 서자복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海輪寺 一名西資福寺在州西大瓮浦口〉라고 되어 있어 1650년대까지는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1700년 전후) 무속 및 불교 타파 정책에 의하여 분괴(焚壞)되면서 원래 이 사찰에 세워졌던 미륵불만 남은 것이다.(김영철의 역사교실 발췌)

 

 

 

우리는 용화사로 들어가 서자복과 만나고 나왔다.

그리고 그 절 입구에 있는 옛집은, 그 옛날 초가집 그대로인데 지붕위로 천막만 올린 모습이 참 정겨웠다.

동한두기를 지나 시내 중심권으로 들어서는 길..

무근성 골목을 지나다 제주에 처음 생겼던 호텔인 동양호텔과 마주했다.

50년대..그 시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에 오면 묵었다는 호텔이다.

하지만 지금은 ‘월셋방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관덕정을 지나는 데 젊은 사람들이 몇몇 한복을 입고 입장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비원 등 궁궐을 관람할 때 한복을 입고가면 입장료가 무료다.

제주에서도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갈 때는 그런 혜택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관덕정이 그 앞에 있다.

 

관덕정

문화재 지정 사항 ; 대한민국 보물 제322호(1963년 2월 7일 지정)
위치 ; 제주시 관덕로19(삼도2동 983-1)
건축년대 ; 세종30년(1448)
유형 ; 관방유적

관덕정은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의 하나로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렀다. 관덕(觀德)이란 이름은 예기(禮記) 제46권 사의(射義)편에 나오는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쏜다는 것은 성덕을 보는 방법인 것이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관덕정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지방의 관아마다 활쏘기가 포함된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지면서 관덕정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지방 관아에 설치된 관덕정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 건물들과 함께 헐려 나갔다. 건물 자체가 온존하는 것은 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이 유일하며, 관덕정이라는 건물도 제주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나무위키)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재에는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으레 활터에 붙는 이름으로 쓰이며,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관덕정(관덕당이라고도 부름) 등 다른 지역에도 관덕정이 있고, 창경궁에도 왕이 활을 쏘던 관덕정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남아 있다.(나무위키)

 

 

 

관덕정을 지나 드디어 이날 종착점인 제주올레 간세라운지가 있는 17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종점 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오후 13시44분이었다.

 

제주올레를 걷는 일은 제주를 아주 자세히 알아가는 여정이다.

제주도민 아무도 제주도를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제주의 모든 곳을 다 돌아다녔다고 말할 수 없다.

올레는 그런 의미에서 약간은, 제주의 모든 곳을 한번 정도는 다 돌아 봤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추억이 된다.

올레를 걸을 때면, 누구는 맑은 공기와 만나고, 어떤 이는 자연과 만난다,

새소리와 만나고 파도소리와도 조우한다.

그러면서 제주와 교감하는 나와 다시 만나는 것이다.

올레에 대해 꼭 한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올레는 자연과 나와의 치유다”라고 말하고 싶다.

올레를 모두 걸어보지 않는 한, 제주환경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레꾼 고광언
올레꾼 고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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