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지달공 유배지....감산리 수안이씨입도조(부인오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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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지달공 유배지....감산리 수안이씨입도조(부인오씨)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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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년 전 보운공의 후손들이 안덕면 사계리에 정착해 마련한 당뒤묘역은 명당

감산리 수안이씨입도조(부인오씨)묘
 

위치 ; 안덕면 감산리 마을회관 동북동쪽
시대 ; 조선(1660년대)
유형 ; 무덤

 


안덕면 감산리 마을회관 동쪽 길로 들어가서 한아름슈퍼에서 20m 더 가면 '감산간 8R7R5'이라는 표식이 있는 전봇대가 있는 길로 들어서면 끝에 김문현씨 집이 있는데 그 집 마당을 거쳐 뒤뜰 쪽으로 가면 울타리에 좁은 통로가 나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과수원인데 밭 가운데에 묘가 있다.


제주도에 수안(遂安) 이(李)씨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시조 견웅공 고려개국공신 의 27세손 지달 공이 아들 시호를 데리고 제주에 유배됨으로써 비롯되었다.

조선 현종(顯宗 1659. 5.∼1674. 8.)초인 1660년대 지달 공은 당시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에 패(敗)함으로써 제주도 감산촌(안덕면 감산리)로 유배된 것이다.


효종의 북벌계획으로 얼마동안 잠잠하던 당파싸움은 현종 때에 이르러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송시열이 주도하는 서인들에게 쫓겨났던 허목, 권대운 등 남인들은 효종 어머니 조 대비의 복상 문제를 들고 나와 서인에 도전하고, 다시 효종 비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또 복상문제로 공략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현종은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다고 주장하는 남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정권은 다시 남인들의 차지가 되고, 그러나 남인 역시 청남파와 탁남파로 갈라지는 등 당파싸움이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지달 공은 어느 당파에 속하고 있었는지, 또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아직까지 관련기록을 찾을 수 없어 확실치 않다. 다만 머나먼 절해고도에 유배된 점으로 미뤄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지달 공은 비록 원거리의 제주도로 정배되기는 했으나, 가족과 동행할 수 있는 혜택을 받았다. 즉, 유형 기간 중에 시중을 들 수 있는 장자(長子)가 배행하였던 것이다.

이 아들이 바로 28세손 시호(時皓)공이다. 이로써 지달공과 시호공은 각각 수안이씨 제주도 입도 1세와 2세가 된다.


수안이씨 종친회에서는 이 두 분 가운데, 제주도에서 혼인을 하고 후사(後嗣)를 둔 아들 시호공을 특별히 입도선조(入島先祖)로 모시고 있다.

시호는 장성한 후 오씨 가문의 딸을 맞이하여 아들 보운(寶雲)을 두었다. 그 후 지달 공과 아들 시호는 정세가 바뀜에 따라 귀양이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씨 부인과 아들 보운만은 그대로 제주에 정착했다. 보운공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면서 충주지씨(忠州池氏) 문중의 규수와 결혼, 아들 우봉(遇鳳-30세손)공을 낳았고 손자 동백(東白-31세손)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들 3대가 모두 독자였다. 340여년의 오랜 입도(入島)역사를 가지고 있는 제주도 수안이씨 씨족이지만 아직도 수적(數的)으로 그리 많지 못한 것은, 3대를 내리 외아들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안이씨종친회에서는 누구를 입도시조로 모실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수안이씨종친회의 홈페이지를 보면 그 결과가 다음과 같이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수안이씨 입도시조 부분을 비롯한 선조 묘를 돌아보기에 앞서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도조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입니다. 수안이씨 입도조를 지달의 손자인 보운으로 삼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곳에 정착했고 그의 뼈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제주종친회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비록 지달과 아들 시호는 이곳에 뼈가 묻히지는 않았지만 제주에 첫발을 내디뎠고 지달의 아들이 이곳 오씨 가문의 딸과 결혼, 대를 잇는 자식을 봤으니 이들이 입도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점 등을 감안, 제주입도조에 대한 인식은 제주종친회의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입도조 시호공의 묘는 당연히 제주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은 오씨부인과 아들 보운이 묻힌 곳을 입도 선영이라 하고 여기에 「입도시조 이공시호추모비(入島始祖 李公時晧追慕碑)」를 세워 유덕(遺德)을 기리고 있습니다.[글:41세손 치우]"


수안이씨 제주도 입도선묘는 남제주군 안덕면 감산리 속칭 '당동산'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 지달공의 유배지인 감산촌이 바로 여기다.

이 선영에는 지달공의 며느리 즉, 시호공의 부인 오씨 묘소와 그 아들 보운공 내외의 묘가 모셔져 있다. 오씨 묘역에는 남편 시호공의 추모비가 함께 서있다. 향(向)은 임좌(壬坐). 북서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는 좌향인 셈이다.


다음은 제주신문(現 제주일보) 1996년 3월 8일과 4월 26일자 '지맥(地脈)' 제127~128호에 게재된 ‘수안이씨 입도선묘’ 내용 중의 일부이다.


“고향을 찾은 것 같은 친근감이 배어 나온다. 아늑하고 편안하기까지 하다. 오씨 부인 묘자리 1기와 아들 보운 내외의 쌍묘자리 1기 등 2기가 바로 붙어있다. 떨어지기 싫은 모정과 이를 가슴속 깊이 새기며 영원을 함께하는 효심이 우러나온다. 제주의 여러 지역 묘자리를 둘러 봤지만, 이와 같은 모습은 극히 드물다. 머리를 들어 앞을 보았다.

산 모양이 군막을 쳐 놓은 것 처럼 보인다는 군산이 동서로 가로 누워 있다. 입도선영이 유연한 양쪽 능선의 품 자락에 안기는 형국이다. 수안이씨 입도선영은 풍수상 '욕심이 없는 땅'이라고나 할까. 이곳은 땅의 기운에 순응하는 자세를 볼 수 있어 좋다. 순응은 생기를 뿜는다. 이처럼 풍수는 인간적이어야 하며 윤리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살았을 적 행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제주도 수안이씨 가문에는 또 다른 선조 묘역이 있다. 300여년 전 보운공의 후손들이 감산촌을 떠나 안덕면 사계리에 정착하면서 마련한 산방산 기슭의 속칭 '당뒤’묘역이 제2의 선영이다.

이곳은 제주 36명혈(名穴)중의 하나로 알려진 명당으로, 저녁을 든든히 먹은 코뿔소가 달을 보며 명상에 잠긴다는 '서우망월형(犀牛望月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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