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걷고 있는 나를 보고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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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걷고 있는 나를 보고 하는 말.."
  • 고현준
  • 승인 2020.01.19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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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18코스 중앙로 간세라운지-삼양해수욕장,선인들을 생각하는 '역사의 길'

 

 

 

겨울이지만 겨울 같지 않은 날씨..

1월 중순인데 봄에 피는 개나리가 피고, 5-6월에야 꽃을 피운다는 개양귀비도 흐드러지게 얼굴을 내밀었다.

지난 18일은 올해 들어 두 번째로 하프 올레를 걷는 날이었다.

시내 중심에서 출발하는 제주올레18코스는 두 번 째 하프올레걷기에 나선 후 벌써 한 바퀴를 다 돌고 만나는 하프코스 올레의 당초 시작점이기도 하다.

 

이날 올레꾼 고광언과 이곳에 선 시간은 9시 30분..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이곳을 찾아 올레스탬프를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주시 중앙로를 관통하는 올레18코스 하프코스 걷기는 시내 중심을 지나 사라봉과 별도봉을 지나 삼양해수욕장까지 걷는 코스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오현단.

제주도 사학의 명문 오현고둥학교가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주택가와 시장으로 변해 버렸다.

 

오현단(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1호)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에 이바지한 오현을 배향한 귤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이다.

오현은 1520년(중종15년)에 제주에 유배왔던 충암 김정, 1534년(중종29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34년)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년)에 제주에 유배왔던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년)에 제주에 유배왔던 유암 송시열 등 다섯 사람을이른다.

1871년(고종 8년)에 귤림서원이 헐린 뒤에 1892년(고종 29년)에 김의정을 중심으로 한 제주유림이 귤림서원의 자리에 제단을 조성했다.

지금은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 5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제단은 1578년(선조 11년)에 제주목 판관 조인후가 가라쿳물 동쪽으로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인데, 1667년(현종 8년)에 충암묘를 현 오현단으로 옮겨 와 사당으로 삼았다.

1659년(효종 10년)에 목사 이괴가 이곳의 장수당을 재로 바꾸어 귤림서원이라 했다.

1682년(숙종 8년)에 사액을 받고 김정,송인수, 김상헌, 정온 등 네 사람을 모셨다가, 1695년에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다섯 현인(오현)을 배향하게 됐다.

 

이곳 오현단이 있는 곳, 병풍처럼 서 있는 바위에는 '증주벽립'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음각돼 있다.

이는 유교 성현인 증자와 주자가 벽처럼 서 있다는 뜻의 마애명이다.

 

1788년(종조 10년) 제주 출신 성균관 직강 변성우가 서울 명륜동에 있는 유암 송시열 집터의 마애명을 탁본해 온 것을 모각한 것이다.

1856년(철종 7년) 제주목사 채동건과 판관 홍경섭이 건립했다고 한다.

옛날 가라쿳물이 좋았던 남수각 계곡을 지나 동문시장으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다.

이곳에 그려진 벽화는 ‘남수각 하늘길의 우리집’이라는 제목으로 제주도의 유망 청년화가인 박주애 작가가 어머니인 전윤숙 화백과 함께 그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소망하는 우리집’이라는 작품설명과 함께 골목길을 빛내고 있었다.

박주애 작가는 몇 년전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모녀작가전을 가졌던 화가 전윤숙 화백(제주벽화 대표)과 모녀지간이다.

아주 좁고 작은 골목길도 이처럼 예술이 접목되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이어진 길은 제주동문공설시장.

처음 이 길을 걸을 때 올레리본을 놓치는 바람에 사라봉에 가서야 겨우 올레리본을 만난 적이 있어 세심히 살피면서 걸었다.

올레길은 산지천을 따라 제주국제부두로 연결됐다.

산지천에는 물이 맑아 그런지 많은 새들이 쉬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늘 관리미흡이라는 문제가 상존하는 곳이다.

안내판은 다 낡아 글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물이 철철 넘쳤던 산지물은 지금, 유량이 크게 줄어 물도 잘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지역주민들은 대대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실정이다.

 

 

 

김만덕 기념관을 지나 4,3당시 민간인수용소로 활용됐던 제주주정공장터를 지났다.

 

제주주정공장 옛터

 

해방 전후, 제주주정공장(1934년 설립)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원료로 주정을 생산하는 주요한 산업시설이었다.

이곳은 4,3 당시 민간인수용소로 이용됐다.

특히 1949년 봄에는 피난 입산했다 귀순공작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대거 수용됐다.

혹독한 고문과 열악한 수용환경으로 수용자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곳에 수용됐던 청장년층 대부분은 재판 후 타지방 형무소로 이송됐고, 이들 중 다수는 한국전쟁 직후 집단 학살됐다.

또한 예비 검속됐다 이곳에 수용됐던 많은 사람들도 수장되거나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학살됐다는 아픈 역사가 이곳에 4,3 유적지라는 표시와 함께 설명돼 있었다.

 

 

이곳을 지난 계단을 오르는 길.

계단을 다 오르면 칠머리당이 있는 곳이다.

 

칠머리당

 

원래 건입포 칠머리에 있었다.

옛 주정공장 부지 조성으로 절벽이 깎이며 제2터로 이전했다.

현재 칠머리 동산 위에는 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제2터는 현 항만청 부근, ‘돈물 나는디’ 절벽 위에 있었으나 산지항 부지 확장공사로 절벽이 깎이면서 현재 사라봉 기슭으로 이전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칠머리당 영등굿

제주시 건입동의 칠머리당에서 열리는 ‘칠머리당 영등굿’은 바다의 평온과 풍작 및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음력 2월에 시행하는 대표적인 제주의 세시풍속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은 온통 영등할머니 그림으로 가득했다.

사라봉을 향해 걷는데 길 위에 빨간 꽃들이 가득 했다.

함께 걷던 고광언은 “양귀비는 보통 3-4월에 파종하면 5-6월에 피는 꽃인데..”라며 겨울날씨에 관상용 개양귀비꽃이 길가에 핀 것을 신기해 했다.

걷다보니 봄에 피는 강낭콩꽃도 피어 있었다.

 

 

 

겨울이 겨울이 아닌 것일까.

사라봉을 오르는 길에서는 노란 개나리를 볼 수 있었다.

사라봉 계단을 따라 정상으로 가는 갈 중간에는 작은 간이 쉼터가 하나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아마 60년대 중반이나 말 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쉼터는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옛날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30년도 안돼 건물을 뜯어내는 일들을 생각하면 옛날 어르신들의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오르고 또 올라 사라봉 정상 팔각정에 올랐다.

하늘은 흐려서 아름다운 한라산 정상은 조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산책객들과 운동하는 사람들 속에서 바다는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사봉낙조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 성내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다.

남쪽으로 한라산을 우러러 볼 수 있고 북쪽으로 훤히 트인 수평선을 바라 볼 수 있다.

어디를 보아도 조망이 아름답지만 특히, 해질 무렵의 낙조는 더욱 아름다워 사봉낙조 라고 하여 영주10경의 하나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봉수대가 세워지고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모충사 의병항쟁탑 독립기념탑과 함께 만덕관 등이 들어서 있다는 표지석이 정상에 세워져 있었다.

 

 

제주시 사라봉은 지난 2010년 제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시민의 숲 부문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을 수상한 제주시 사라봉 해송숲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사라봉을 뒤로 하고 별도봉으로 들어섰다.

사라봉이 운동을 하는 곳이라면, 바로 이웃해 있는 별도봉은 천천히 걸으면서 산책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최근에는 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와 걷는다고 한다.

걷는 산책길도 아름답지만 걸으면서 바라보는 바다도 일품이다.

이날도 많은 사람들이 별도봉을 찾아 걷고 있었다.

 

 

별도봉

 

제주시 화북동 바닷가 오현고등학교 뒤에 위치한 오름으로 주변에 사라봉과 알오름이 기슭 자락에 맞대어 이어져 있다.

이 오름은 화산쇄설성퇴적암(화강암포획)과 용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원추형으로 보이나 별도봉 알오름 사이의 해안선 노두 단면은 오름 자체 북서측에서 바다와 접하는 급경사의 화구를 인정할 수 있다.

정상봉에는 북측사면의 등성이가 바다쪽으로 뻗은 벼랑이 속칭 ‘자살바위’이며, 벼랑 밑 해안단애에는 ‘고래굴’과 ‘애기업은돌’이라는 기암이 있다.

전체적인 식생 분포는 남쪽 사면에 일부 삼나무 조림지가 있고 그 외 지역은 잔디가 우점하고 있는 단초형 식물군락으로 구성돼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올레코스는 예전의 곤을동을 지나는 코스를 비켜나 바닷가가 아닌 다른 숲 속으로 안내해 무미건조한 길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을 지나는 코스가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숲속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북을 지나 바다로 나오는 드넓은 계곡과 만났다.

예전에는 이 계곡에서 붕어를 잡기도 했었는데..지금은 물 자체가 모두 말라 있었다.

계곡을 다 부숴버리는 일직선 공사 때문이다.

 

무슨 흔적인지 돌마다 하얗게 묻어 흐른 보기 흉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4,3당시 초토화 돼 터만 남아 있는 마을 곤을동을 멀리서 바라보며 이 길을 지나쳤다.

18코스의 비경은 사실 이곳에 숨어 있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뒤로 보이는 산지등대와 사라봉 그리고 별도봉 절벽은 멀리서 봐도 절경이다.

이 비경은 올레를 걸어야만 보이는 비경이다.

 

해안도로를 향해 걷는데 바닷가에는 쓰레기가 또 가득이었다.

바닷가쓰레기는 늘 바다가 주는 아름다움을 반감시킨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현상을 중요하게 보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환경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점을 반증한다.

 

바로 이곳에는 개인 집 마당에 돌을 세워놓아 각종 석부작으로 작품을 만들어놓은 곳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바람이 불어 약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 하얀 구름이 푸른 하늘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화북마을을 지나는 동안 하늘의 구름은 모습을 달리 하며 자연의 숭고함을 보여주었다.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현상..

그런 모습은 포구와 함께 하면 그림을 그린 듯 더 아름다워진다.

 

 

 

화북에는 모두 3개의 샘물이 바닷가에 있었다.

하지만 다 둘러보지는 못했다.

이미 마실 수 없게 된 물이기 때문이다.

 

화북포(유지)

 

조선시대 조선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이 되었던 포구. 1737년(영종 13년) 항만이 불완전하여 풍랑이 일 때는 항내에서 파선되는 일이 자주 일어 났으므로 김정 목사가 몸소 돌을 지어나르는 등 앞장 서어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했다.

김 목사는 이임에 앞서 과로로 이 포구에서 운명하며, 부임하는 목민관이나 김정희 최익현 등유배인들도 이 포구로 들어오는 사연 많은 역사의 현장이다 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다.

 

 

해신당을 지나 화북환해장성을 지났다.

이곳 화북 환해장성에는 또 바다쓰레기를 잔뜩 모아둔 곳이 있었다.

화북별도연대가 있는 그 앞쪽이다.

아마 처리할 방법이 여의치 않아 그렇게 모아둔 것이리라.

화북-삼양 경계지역을 지나는데 커다란 공사판이 하나 서 있었다.

 

공사명은 화북상업지역 도시개발사업 기반시설공사였다.

이곳에 도로, 공원, 주차장, 아파트(8층)를 세운다는 공사안내문이었다.

이곳도 이제 옛 모습이 모두 사라지게 될 모양이다.

무심한 소나무 하나가 공사판 판막이에 갇혀 있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삼양으로 들어서자 가장 처음 만난 모습은 궤물이라는 샘물이었다.

그리고 나타난 새각시물..

 

 

새각시물

-정인수

 

벌랑 새각시물에서

술잔을 들면

술잔에 파도가 친다.

 

서동 파도는 벌랑!

중동 파도는 거문여!

동동 파도는 사근여!

 

파도가 잦아들면 다시

누각 아래로

새각시 멱 감는 소리..

(각주 내용과 시인 약력은 삼얌동 홈페이지(주소)에서 확인하세요)라는 친절한 안내와 함께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새각시물

 

삼양3동은 일주도로 북쪽에 위치하여 바다를 모두 접하고 있으며, 파도소리가 서로의 파도를 가르는 듯 하다하여 칠벌(伐), 물결랑(浪)을 이어 벌랑(속칭 버렁)이라 불리웠다.

이곳은 옛 사람이 여자의 몸매를 닮았다고 하여 새각시물이라 이름하였다.

마시고 몸감고 빨래하던 곳,해안도로 개설로 땅속에 묻힐 뻔 하였으나 보조금 받아 복원하였으니 아끼고 즐겨보세.(2007,8,1 삼양3동 주민일동)라는 비석도 또 하나 서 있었다.

 

 

 

삼양에 들어서니 바다는 더욱 사나워지고 있었다.

파도가 더 세지고 하얀 파도는 더 크게 넘실댔다.

하지만 삼양해안가는 모래가 참 많은 곳이었다.

그만큼 자연의 섭리가 잘 작용하는 바닷가 마을인 듯 곳곳에 모래톱이 쌓여 돌이 풍성한 다른 마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파도가 세어서일까

삼양해수욕장에는 파도를 즐기는 사람이 꽤 있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 윈드 서핑을 즐기는 사람 등등이 겨울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중간스탬프 포스트는 이 삼양해수욕장 동쪽 끝자락에 놓여 있다.

야트막한 모래언덕 위에 서 있는 시비 하나..

 

 

삼양동 연가

-오영호

 

새벽 범종소리에 눈뜬 텃새들이

불탑사 5층 석탑 천년의 빛을 물고

원당봉 한바퀴 돌아 삼양동 문을 열면

옛 마을 선각자들 화합의 손을 잡고

삼양의 깃발 올린 선주민 원형움집엔

넘쳐난 한라의 푸른 정기 거리마다 빛나네

 

호미같은 해안가로 춤추며 달려온 파도

올레길 걷고 있는 나를 보고 하는 말

찌든 몸 검은 모래로 찜질하고 가라는..

순한 귀 열어놓은 정 많은 이웃들이

일궈낸 터전마다 피어나는 사람향기

바다엔 사랑의 꿈을 낚는 통통배가 떠있네

 

2017년 7월에 한곬 현병찬 선생의 글씨로 쓰여진 시라는 설명이 있었다.

 

 

올레를 걷다보면 늘 많은 시와 만난다.

인생길은 시를 쓰는 것과 닮았다.

머리와 가슴으로 쓰는 시라는 장르와 다리와 시간을 쓰는 올레라는 겉모습만 다를 뿐이다.

인생도 사실은 시를 쓰듯 사는 것이다.

제주올레 18코스는 제주시내를 완전히 관통하는 코스라는 점에서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걷지 않는 한 올레길에 다다를 수 없다.

올레는 한 코스를 제대로 마음 먹고 걷고 나면 다음 코스를 걷게 된다.

올레길 앞에서 망설인다면 올레길로 들어설 수 없다.

그러나 한 코스를 걷고 나면 올레꾼으로 나설 수 있다.

그렇게 제주도민은 모두 올레꾼이 되어야 한다.

제주올레를 사랑하게 되면 제주도가 더 자랑스럽고 더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올레를 계속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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