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내와 내 사이 마을..색달동 냇새왓마을터(잃어버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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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내와 내 사이 마을..색달동 냇새왓마을터(잃어버린마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23 0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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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흔적은 올레길과 당시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화전의 형태가 남아 있는 정도다

색달동 냇새왓마을터(잃어버린마을)
 

위치 ; 서귀포시 색달동 산 50번지, 산 51번지, 산 52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마을 터(잃어버린 마을)

 


천서동은 색달동 구역 내에 있는 마을이었다. '막은다리' 마을 북서쪽 산간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민간에서는 '냇새왓' 또는 '냇서왓'이라고 부른다. 곧 내와 내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천서동(川饍)은 '냇서왓마을'의 한자 차용 표기이다. 천서(川西)를 한자의 뜻 그대로 이해하고 내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는 것은 민간의 음성형을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차자 표기에 대한 몰이해에서 생긴 것이다.(1998 『제주의 오름과 마을 이름』)


냇새왓에는 1850년대부터 장(張)씨가 입주하여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뒤 강(姜), 한(韓), 허(許)씨 등의 여러 성씨가 입주하여 마을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이 마을을 통과하는 '천서동길'이 있는데 '천서동'에서 '머구낭동산'까지의 길이며 색달동 750-1번지 도로이다. 색달마을에서는 남북 종단의 중요한 길이다. 이 길을 통해야만 공동묘지의 출입과 목장의 출입이 가능하다. 지금은 서부산업도로에서 제2횡단도로사이에 산록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색달동에서 산록도로까지 시멘트포장으로 길이 나 있다.(Daum 신지식)


천서동은 마을 북쪽으로 제2산록도로와 접해 있다. 서부 관광도로를 달리다 제2산록도로로 빠져 탐라대학교 방면으로 약 7㎞ 정도를 달리다 보면 길 북쪽으로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그 곳부터 다시 같은 방면으로 500m를 더 가면 길 남쪽으로 '야구인의 마을'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그 곳 일대가 냇서왓(천서동) 옛 마을터이다. 현재는 마을이 있던 곳에 산록도로가 형성되어 있어서 길 북쪽과 남쪽으로 마을터가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신설됐던 천서동은 '야구인의 마을'로 들어가면 바로 나온다. 현재 그 곳에는 신설된 후 지었던 집터들이 남아 있다.


4·3 당시 약 45가구, 120여 명 정도의 주민이 화전갈이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천서동은 동동과 서동으로 나뉘어진 비교적 큰 자연마을이었고, 주민들은 서동보다는 주로 동동에 많이 거주하였다.


천서동은 1948년 11월 중순경 낮에 토벌대가 마을을 방화하면서 대부분의 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이 날 토벌대는 안덕면 서광리 쪽에서부터 마을을 불지르면서 강정리, 염돈 방면으로 넘어가다 천서동을 방화한 것으로 사전에 주민들에게 통지도 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다.

다행히 주민들은 서쪽에서 들어오는 토벌대를 보고 미리 피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당시 주민들은 집들이 방화되는 동안 근처에 숨어 있다가 토벌대가 가버리자 불타버린 집 귀퉁이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후 주민들은 색달리 본동으로 내려가거나 인근인 안덕면이나 한림면으로 소개하는 등 각처로 흩어졌고, 일부는 근처의 곶자왈에서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게 잡혀 희생되기도 했다.


허경화(남, 04년 85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색달리는 자연동굴 같은 은신처가 없어서 주민들은 근처에 숨어지낼 때도 뿔뿔이 흩어져 곶자왈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숨어 지낼 때에도 주민들은 아기 엄마와는 같이 숨어 있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기가 울면 바로 토벌대에게 발각돼 희생되었기 때문이다.(http://www.jeju43.org/ 4·3연구소)


1948년 12월 초순경 색달리 본동에도 소개령이 내려졌고 주민들은 모든 집의 지붕을 뜯어낸 후 대부분 중문으로 소개했다. 일반적인 소개 시기보다 보름 가량 늦은 것이었다. 토벌대는 또한 색달리를 불지르지도 않았다. 이런 정황은 당초 토벌대가 색달리를 소개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케 한다. 산으로 토벌 가는 길목인데다 토벌대의 통제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http://www.jemin.com/제민일보)


이듬해 색달리 본동이 재건되고 주민들이 돌아오면서 천서동 주민들 중 일부도 마을로 돌아왔으나 바로 천서동으로 가지 못하고 본동에 머물렀다. 그 후 1960년대에 천서동이 재건되면서 원래의 천서동 아래쪽에 14세대 정도가 돌아와 살았다. 그러나 이들도 생활고로 본동으로 이주하거나 각처로 흩어지면서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천서동 주민들 중 4·3 희생자는 약 15명이다. 당시 천서동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강영만, 한흥만, 김영지, 김보신, 한형팔, 한갑생, 김경함, 오태진, 김공삼, 성상호, 성개천, 허치생, 허달규, 허치일, 허달구, 한흥률, 한흥염, 김서생, 양달호, 양시종, 김필현, 한흥찬, 한흥선, 김축생, 김남순, 송관평, 김달흥, 강시윤, 허달화, 허달희, 강권삼, 강천권, 한무생, 김기택, 박명원, 김성권 등이다.

 

신설됐던 천서동은 향교 땅에 무상으로 조성한 것이었으나 그 후 주민들이 살기 힘들어 색달 본동으로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그 곳마저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타지에서 온 2가구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신설된 마을마저 롯데골프장 부지에 편입되면서 없어져 버릴 위기에 놓여 있다.(http://www.jeju43.org/ 4·3연구소)


현재의 천서동은 1960년대에 재건되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현재 이 곳은 인적이 드물어 새로 조성된 삼나무숲 속에 가시덤불만이 무성한 속에 재건했던 건물들 몇 채의 벽체와 통시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흔적은 올레길과 당시 그 곳 주민들이 농사를 짓던 화전의 형태가 남아 있는 정도이다. 마을 게시판으로 썼을 것으로 보이는 시멘트 구조물에는 '지도자 허여필 반장 박종진 1975년 6월 11일 건입(建立) 협동으로 자립하자', 길쪽 면에는 <계시판> <남제주군초등여교사회 기증> <총화 단결>이라고 음각되어 있어 1970년대까지는 마을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3 이전의 집터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길 옆에는 다음과 같은 '냇서왓(川饍) 痕迹碑'가 세워져 있다.


〈本洞은 해발 400 고지 선상에 위치 東쪽으로는 속칭 감티동산, 백만원케, 서쪽은 서동네동산, 북쪽은 모라리오름과 병풍석, 남쪽은 앞동산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 안에는 1850년대 초부터 晉州姜氏, 陽川許氏, 金海金氏 등 40여 세대가 씨족을 이루어 윗빌레, 서동네, 동카름 등으로 호칭 삶의 터전이던 곳.

목축과 火田에 의존하여 주작물로는 지슬(감자), 메밀(메밀), 마시리조, 봉개시리조, 산뒤(밭벼), 팥 등 산성토양에 적합한 작물을 재배 해변 마을과 쌀, 보리 등을 물물교환 양식하였고, 생활용수는 나는물, 새물통, 앞내창, 만내꼴내창, 큰올영, 셋올영, 웅통물 등지에서 봉천수로 먹었으나 극한 가뭄에는 동천전물을 이용하면서 한 집안 식구처럼 살아오던 중, 1948년 제주 4·3사건이 발발하자 동년 음력 10월 11일 진압부대에 의해 전가옥을 불지르고 강제소개령을 발동 산산히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1962년도 5·16혁명 정부하에 25세대가 융자금으로 재건 입주하였으나 차츰 소득이 떨어져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동되어 역사 속의 마을로만 불리게 되었다.이에 마을의 역사를 이 비에 새겨 후손들에게 알리고 냇서왓 火田마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이 표석을 건립합니다. 서기 2005년 월 일 색달마을주민일동 건립 ; (주)롯데골프장 글쓴이 ; 냇서왓마을 후손 許忠濠 韓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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