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관음사전투로 불리는 교전.. 아라1동 관음사 토벌대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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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관음사전투로 불리는 교전.. 아라1동 관음사 토벌대초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2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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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불타자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라1동 관음사토벌대초소
 

위치 ; 제주시 아라동 387번지
유형 ; 방어유적(토벌대초소)
시대 ; 대한민국

 

 

1909년 여승 안(安)봉려관에 의해 창건된 관음사는 깊숙한 산중이라는 여건과 한 때 무장대의 본거지였던 어승생악과 가까워 4·3 초기에는 무장대가 가끔씩 드나들기도 했다.

그러나 토벌이 강화되면서는 토벌대가 인근에 주둔했고 끝내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사삼 당시 한 때 재산유격대의 도당시령부가 이곳 관음사에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1949년 2월 12일 군경토벌대가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느라 관음사 건물을 모두 불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관음사 군주둔지는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2연대 2대대(대대장 이석봉 대위) 병력이 주둔했던 곳이다.

관음사 근처는 4·3 발발 당시부터 무장대의 본부가 있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무장대 측에게도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장대는 한라산으로 내몰리면서 어승생 쪽으로 옮겨갔고, 2연대는 관음사를 불태우며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관음사 군주둔지 옛터는 관음사 입구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보면 관음사측에서 당시 초소를 보호하는 목책을 설치해 놓은 것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100m 정도 들어가면 당시 숙영지와 초소들을 볼 수 있다.


흔히 '관음사 전투'로 불려지는 교전은 관음사 인근에 주둔한 토벌대와 매복한 무장대간의 전투와 피난입산한 주민들을 토벌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봉려관 스님이 대둔사에서 가져온 300년 된 목불상도 탔다고 한다. 그런데 이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웅전에 불을 붙이자 300년 된 목불에도 불이 옮겨붙었는데 그 부처가 노했는지 몸체가 격하게 떨리고 눈이 벌겋게 되어 번쩍번쩍 빛을 내더니 결국 '펑' 소리와 함께 폭파되었다고 한다.

이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

당시에 목불은 관음사가 아니라 제주시내 포교당에 옮겨져 있었기 때문에 타지 않고 현재에도 남아 있으며 그게 지금은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제주역사기행 98∼99쪽)


자료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일지. G-2보고서. 1949.4.1>에 의하면 1948년 12월 15일 경비대가 관음사 인근에서 8명의 무장대를 사살했고 1949년 5월에는 5명을 사살, 20명을 생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관음사 인근에서의 전투로 토벌대도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또 아라리 등 인근 주민들의 피난입산도 많았는데 이들 중에도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 이가 적지 않았다.


9연대 출신의 한 증언자는 “토벌작전 중 관음사에 들이닥친 지휘관이 관음사 승려를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어린 나이에 관음사에 기거했던 중원스님에 따르면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불타자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1949년 2월 12일 대웅전, 향적전, 종각, 해월각 등 8채로 구성된 관음사는 토벌대에 의해 전소됐고 1968년 복원하였다.(http://www.jeju43.org/제주4·3연구소)


2003년에 제주도와 (사)제주4·3연구소가 공동으로 4·3유적지 전수 조사를 한 바 있다. 이때 4·3유적을 10가지 항목으로 분류했는데 ‘관음사 군주둔지’는 항목 중 ‘주둔지’에 해당하며 4·3 기간 2연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조사되었다.

관음사 군주둔지터는 관음사 남쪽 5만여 평의 밀림 지대에 중대와 소대급 숙영지 27곳이 당시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규모가 큰 중대급 숙영지는 가로 세로 25m 규모이고 그보다 작은 소대급 숙영지와 3~4명이 잠복할 수 있는 초소도 여러 군데 남아 있다. 관음사 뒷산인 해발 650m의 아미봉 정상에도 숙영지와 초소가 비교적 훼손이 안 된 상태로 남아 있다.

관음사 입구의 초소는 관음사 기반 정비를 하면서 일부 훼손한 것을 복원한 것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은희)


관음사는 현재 많은 증개축과 확장으로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성역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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