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토벌대에 88명 희생..월평동 마을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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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토벌대에 88명 희생..월평동 마을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1.31 0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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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두 곳 약 250m.. 당시 주민들의 악전고투한 흔적도

월평동 마을성담
 

위치 ; 제주시 월평동 1057번지 일대
유형 ; 방어시설(성)
시대 ; 대한민국

 

 

 


1950년 초에 이르러 4.3사건이 평정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월평동에 거주했던 동민들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당시는 산 사람들이 소수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월평까지는 출입하지 못할 때임) 자기 밭에 약간의 농사를 지어 생활고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며 1954년 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당년 말 축성이 완공됨에 따라 각처에 흩어져 생활하던 주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하여 복구마을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청년이 4․3으로 희생되고, 6․25 발발로 군대에 가버려 노약자와 부녀자들이 축성과 경비를 담당할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을 영위했다.

특히 월평리는 다른 마을보다 재건이 늦어져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을 쌓을 때에는 각지에 흩어져 생활하던 마을 주민과 화북 주민들의 부역으로 1954년 가을에 마을 중심부에 약 8,000 여평 면적에 둘레 700여m, 높이 3m, 폭 1m의 성곽을 축성하여 남북으로 출입문을 만들고 성곽 주변은 실거리나무를 쌓아 외부에서 성곽 위를 오르지 못하게 방어망을 설치하였다.


남북 출입문에는 초막을 지어 밤에는 경계병을 세워 감시를 하였고, 마을을 보존하기 위하여 경찰관 1명을 배치하여 감시하게 되므로 사방에 흩어져 생활하는 주민들이 하나 둘씩 성곽 내에 정착하게 되었다.


월평동 복구는 1954년 봄부터 시작하여 그 해 9월말까지 성곽이 완성되므로 주민들이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말에는 35세대 100여 명이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마을 주변에 건축자재로 사용할 나무가 없어 움막 정도의 집이었으나, 정부가 연말에 4.3 복구용 건축자재를 세대당 1,000才 정도를 보급해 주어 움막을 초가로 개량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마을 전체에 밭갈이 소는 4마리에 불과하였고 연자매는 한 곳뿐이었다. 당시 입주한 주민들의 밭작물은 조,콩,팥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농민들은 축산과 양돈을 겸하여 생활하였다.


1957년 봄 2차로 건축자재가 정부에서 다시 지원되자 이에 힘입어 25세대가 추가로 가옥을 신축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는 사회질서가 안정을 되찾게 되어 성 밖에도 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도에 이르러 정부 차원의 복구주택 자재를 배급받아 주택을 짓게 되자 피땀으로 쌓은 성곽이 주택 벽담 쌓는 재료로 허물어져 현재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두 곳 약 250m 남아 있어 그 당시 주민들의 악전고투한 흔적이 남아 있다.

신대근 집 울타리 약 150m, 김양언 집 뒤쪽 약 100m에 당시 쌓았던 성의 일부가 두 군데 남아있다.


월평리의 인명피해는 모두 88명인데 산쪽에 의한 피해는 없고 모두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다. 88명 중 실제 월평리에 거주하던 중 희생된 수는 70명 안팎이다.

나머지 18명 정도는 본적지만 월평리이고 당시 월평 주민들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4.3 발발 직후 산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민애청을 조직하려다가 중단된 이후 좌익활동이 없고 산쪽에 가담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토벌대에 이렇게 많이 희생된 것은 중산간이라는 지역적인 요인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월평동 마을지「다라쿳」82-90쪽, 제주4․3연구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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