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중앙에 잘 보이려는 의도 ..삼도2동 이최응영세불망비
상태바
[향토문화]중앙에 잘 보이려는 의도 ..삼도2동 이최응영세불망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2.07 0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목사 백낙연이 중앙의 집권세력이 바뀌면서 이최응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 제주 유지들이 표출

삼도2동 이최응영세불망비
 

領相李公最應永世不忘碑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432번지 제주목관아지 북동쪽 구석
시대 ; 조선후기
유형 ; 비석(선정비)

 

 


이최응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며 문신으로서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반대했었다. 이 비석은 그가 이조판서 및 영의정으로서 제주 지역에 쌓은 공덕을 기리는 비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아버지는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다.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형으로 흥인군(興寅君)에 봉해졌다.

1863년(고종 즉위)에 종척집사(宗戚執事)가 된 후 좌찬성 등을 거쳐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고, 판의금부사·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대원군 정권하에서는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으나, 서도(書道)에서 재능을 발휘해 옥보전문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존호옥책문서사관(尊號玉冊文書寫官) 등을 지냈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이 수립되자, 호위대장을 거쳐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875년 세자의 스승을 겸하면서 예전과 격식이 다른 일본의 서계(書契)를 받아들이자고 했으며, 그 해 영의정이 되었다.

1880년 부산이 개항된 후 수령들이 뇌물을 받고 몰래 미곡을 파는 행위를 엄히 처벌하자고 했고,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내용에 대해 고종이 묻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믿지 않을 것이지만 미국과 연교(聯交)하는 것은 좋은 계책일 것이라고 했다.

1881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1882년 광주부유수를 거쳐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임오군란 때 난민(亂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효헌(孝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1884년 충익(忠翼), 1905년 문충(文忠)으로 다시 내려졌다.

비기를 요약해 보면


“성상(聖上)이 즉위(即位)하던 첫해 공(公)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널리 백성들에게 알렸고 총리대신(總理大臣)으로 있으면서는 전 심력(心力)을 다하여 모든 일을 잘 처리하였는데 더욱 우리 제주도를 위해서는 각별한 배려가 있었다.


고종 14, 15년(1877, 1878)의 두 흉년에는 제주(濟州), 정의(旌義), 대정(大淨) 삼읍민이 모두 죽게 될 판이었는데 임금에게 품신하여 호남사창미(湖南社倉米)를 보내어 굶주린 백성을 살렸다.

또 어진 수령을 골라 보내어 상감의 뜻에 따라 기민구제(飢民求齊) 사업을 해내도록 하였으니 지금은 우리 고을이 오히려 잘 먹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마을이 이처럼 편안해진 것이 누구의 덕인가.


과거(科擧)에는 제주의 주호(州號)를 별서(別書)하도록 하여 특전을 베풀었으며 이를 악용하여 타도인이 제주를 모칭(冒稱)하는 자가 있으면 엄밀히 조사 처벌하였으며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는 우선 뽑도록 하고 무과합격자(武科合格者)로서 선전관(宣傳官)을 천학(薦學)하는 제도(制度)를 창시하였으며 무과(武科)에 사소한 내용까지 붙이게 하여 제주인에게 큰 덕을 베풀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하여 비를 새기고 관아의 앞뜰에 세워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잊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굶주린들 누가 먹이며 은혜롭다 한들 누가 너에게 베풀 겠는가. 우리 임금은 위에 계시고 어진 재상은 이를 보필한다”는 이최응 영상(李最應令相)의 찬양시(讚揚詩)가 새겨져 있다.

제주판관을 지낸 송상순(宋祥淳)이 글을 짓고 진사(進士) 김량수(金亮洙)가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제주도 내에 세워진 선정비(善政碑)나 공적비(功績碑)들은 대부분 목사(牧使)나 판관(判官)들의 비이다.

직접 목민관(牧民官)으로 부임(赴任)하여 정사를 맡아보지 않았던 사람의 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사항으로 보아 이최응 영세불망비는 매우 이례적인데 이는 당시 목사의 거취와 관련이 있지 않나 추정해 본다.

즉, 제주목사 백낙연이 중앙의 집권세력이 바뀌면서 이최응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를 제주 유지들이 표출시켜 준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후 복권된 대원군에 의해 이최응이 피살되면서 백낙연은 다른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비신은 높이 186cm, 너비는 윗부분 74.5cm, 아랫부분 70.5cm, 두께는 윗부분 30cm, 아랫부분 29cm, 댓돌은 높이 14cm, 앞너비 10.9cm, 옆너비 83cm로서 비의 높이는 갓돌이 없는데도 200cm에 이른다.

뒷면에는 “崇禎紀元後五庚辰孟秋”이라 되어 있어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1627)으로부터 5번째 경진년이다. 건립년대는 1880년임을 알 수 있다. 孟秋라고 하였으므로 음력 7월일 것이다.

《작성 081015, 보완 15090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