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왕자에 대한 두 가지 설..화순리 양왕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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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왕자에 대한 두 가지 설..화순리 양왕자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2.08 0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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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불러온 명칭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양왕자가 탐라국인지 운남국인지..

화순리 양왕자터
 

위치 ; 안덕면 화순리 333번지 일대
시대 ; 탐라시대 또는 고려말 조선초
유형 ; 위인선현유적

 


화순리 333번지 일대를 예로부터 양왕자터라고 부른다.

언제부터 불러온 명칭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양왕자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1)탐라양왕자거주설


탐라개국신화에 의하면 삼신인이 벽랑국 공주와 혼인한 후 거주지를 정할 때 활쏘기(射矢卜地)를 했는데 이 때 고을나는 일도, 양을나는 이도, 부을나는 삼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여기 언급된 일도, 이도, 삼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나, 세종32년(1450) 고득종이 지은 '耽羅高氏族譜' 序世文에는 일도는 한라산 북쪽(제주목 지역), 이도는 한라산 남서쪽(대정읍 지역), 삼도는 한라산 동남쪽(정의현 지역)이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양을나의 부족이 유력집단으로서 이 지역에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梁氏世譜에서 확인가능한 왕자직을 가졌던 사람으로는 梁頭羅(재위 1045~1052), 梁用才(1198년 고려 조정 입조) 등을 볼 수 있다.


(2)운남양왕자거주설


고려말에 운남국(雲南國, 지금의 베트남 지역) 梁王의 아들인 붜붜(伯伯)太子가 원나라가 망함에 따라 제주에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세력으로 끝까지 항거하고 있던 운남을 정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때(1381년) 운남왕(일명 양왕) 파잡랄와이밀(把 剌瓦爾密)은 치소인 곡정(曲靖)이 함락될 때 보녕(普寧, 관광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신하들과 함께 자결했다.

이듬해 4월 운남은 완전히 평정되고 위순왕자(威順王子) 붜붜태자를 비롯한 운남왕의 가족들은 모두 탐라에 유배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붜붜태자의 아들 六十奴와 환관 卜尼를 소환하여 1390년 명에 갔다가 다음해 제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생활이 어려움을 고려하여 식량이나 의복을 하사하였다.

그 후 후손들은 양(梁), 안(安), 강(姜), 대(對)씨 등 운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가지고 살았다는데 현대에 와서 그 후손들을 추적해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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