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진상물 수송하다 태풍 만나..금성리 宋氏三父子충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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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진상물 수송하다 태풍 만나..금성리 宋氏三父子충효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2.15 0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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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과 효자가 한 집안에 온전한 것은 공의 삼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성리 宋氏三父子충효비
 

위치 ; 애월읍 금성리 마을 입구 비석거리
시대 ; 조선
유형 ; 비석(충효열비)
비석의 크기 ; 높이 84㎝, 너비 42㎝, 두께 16㎝
비석의 이름 ; 忠孝宋擎天義明仁明三父子之閭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송경천은 1794년(정조 18) 아들 송의명·송인명과 함께 진상물을 수송하다가 태풍을 만나 소주부에 표류하였다.

그들은 육로로 되돌아오다가, 송경천은 봉황성에서 죽었다. 아들 형제는 부친의 시체를 메고 혹은 업어서 제주에 귀환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효자로 표창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순조22년(1822) 조정화어사에 의하여 정려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충신과 효자가 한 집안에 온전한 것은 공의 삼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공은 여산인(礪山人)으로 부원군 정가(正嘉), 이름 서(瑞)의 22세손이다.

정조 갑인년(1794)의 농사가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나라에서 곤궁한 백성을 구원해 주는 은택을 입어 온 집안 식구가 큰일없이 지내게 되었음을 생각하며 국은에 보답하고자 뜻을 품고 있던 차에 어포(魚脯)진상의 계절을 당하여 본래의 소원대로 자진해서 한 배에 두 아들과 함께 타고 진상물품을 가지고 출륙하였는데 갑자기 큰바다 가운데서 태풍을 만나 표류한 지 스무날에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만났으나 공은 옷깃을 바로하고 정좌하여 진상물을 동여매고 삼가는 마음이 극진하였다.

두 아들도 곁에서 모시면서 삼가 하느님께 구명을 축원하였는데 소주부 지경에 표박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공은 연로하여 마음을 가다듬었으나 불행히 봉황성에서 죽었으므로 현제는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혹은 매거나 혹은 업고서 산과 바다 만리를 돌아온 뒤 선영에 장사지내었다.

면과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이 사실을 알리니 본주 목사가 완문을 만들어 주었고 사림도 천거하여 철종3년(1852)에 어사가 포양을 하였고 임금께 아뢰는 영광을 입었으니 찬란하게 빛나도다. 이는 어찌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닌 모두의 영광이 아니랴!〉(북제주군 비석총람 251~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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