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왜구 방어와 정의현 보호..성읍1리 정의현성서문(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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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왜구 방어와 정의현 보호..성읍1리 정의현성서문(변형)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2.16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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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도 재현했는데 그 모양이 옛모습과 전혀 다르게 만들어졌다.

성읍1리 정의현성서문(변형)
 

위치 ; 표선면 성읍리 정의향교 남쪽
시대 ; 조선 초기
유형 ; 읍성(邑城)

 

 


높이 4m, 둘레 756m로 세종5년(1423) 왜구 방어와 정의현 보호를 목적으로 축성했다.

그보다 앞서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읍성을 설치했다가 조정에서 5년 후인 세종4년(1422) 12월 도안무사 정간에 명하여 정의성을 진사리로 옮기도록 하고, 그 이듬해인 세종5년에 3읍 백성을 出役시켜 제주목 판관 김치겸이 감독하여 석축을 했다.

당시 성의 주위가 2981척이요 높이가 13척이었다. 현재 남문과 서문이 기와집으로 복원되었고, 성도 대부분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고 조금씩 차이가 있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115쪽) 성문의 남쪽으로는 성의 안팎으로 통할 수 있는 작은 통로를 만들어놨다.


이 성의 문루는 1980년대에 한식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문루는 기와집을 나타내는 회색으로 그려졌지만 동문루와 서문루는 초가를 나타내는 노란색으로 그려져 있다.

초가였던 서문이 기와집으로 바뀐 것인지, 바뀌었다면 그 시기는 언제였는지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문을 기와집으로 재현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옹성도 재현했는데 그 모양이 옛모습과 전혀 다르게 만들어졌다.

도내에 있는 옹성 가운데 그 터가 가장 정확하게 남아 여장을 제외하면 제대로 재현된 곳이 명월진 남문 옹성인데 이것과 비교해 보면 ①크기가 너무 작으며 내부 공간이 좁고 ②둥글게 되지 않고 거의 직각으로 만들었으며 ③출입통로가 밖에서 보면 나무로 만든 성문이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너무 훤히 보여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는 등 잘못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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