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리(里) 단위의 마을 중 최대의 참화..노형동 드르구릉(잃어버린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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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리(里) 단위의 마을 중 최대의 참화..노형동 드르구릉(잃어버린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2.19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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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에서 벗어난 이들은 아흔아홉골, 어승생악, Y계곡 인근의 '청산이도' 까지 올라가 피신생활

노형동 드르구릉(잃어버린마을)터

 

위치 ; 제주시 노형동 '드르구릉'
유형 ; 마을터(잃어버린마을)
시대 ; 대한민국

 

 

 


미리내공원에서 북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처음 신호등 지나 바로 동쪽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면 '잃어버린마을' 표석이 보인다. 이곳이 '드르구릉' 마을터이다.


1948년 11월 19일, 노형리 주민들은 오라리 정실 마을이 불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 두려움은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이날 오후 군인 토벌대들은 노형마을로 들이닥쳐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4 3 당시 제주읍 노형리는 제주읍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원노형, 월랑, 정존, 광평, 월산 등 5개의 큰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형리는 현재 광평과 월산을 제외한 3개 마을이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사회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상가, 아파트, 호텔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제주시 최대의 뉴타운으로 변모해 있다.

그러나 문촌의 전통이 이어져 숱한 인재들을 배출한 이 마을은 4 3으로 인해 인명 희생만도 5백50여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리(里) 단위의 마을 중 최대의 참화를 겪었던 것이다.


노형리 주민들이 4 3의 광풍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5 10선거를 맞으면서부터였다. 주민들은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두 그랬듯이 5개 마을별로 투표를 거부하기 위해 주변 산야로 피신했다. 노형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된 최초의 사건은 1948년 11월 19일 발생했다.

이날 웃한질(현재의 평화로)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던 9연대 병력이 월랑마을을 지나 초남동산에 이르렀을 때 방일리 동산에서 빗개(보초)를 서던 사람이 나팔을 불면서 군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리자마자 노형마을에 대한 방화를 시작했다.


9연대는 월랑 마을 섯동네로 들이닥쳐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쏴 죽였다. 그런 다음 군인들은 정존, 광평마을로 가서 방화와 학살을 계속했으며 다음날에도 이어져 노형리 모든 마을이 불에 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이 19, 20일 이틀 동안 벌어진 9연대의 학살로 월랑 마을에서만도 조병구(74), 현승민(68), 현돈석(65), 현유아(48 여), 조광영(4) 등 노인, 부녀자, 어린이 할 것 없이 20여명이 희생되었다.


마을이 소각된 후 노형 주민들은 이호리, 도두리 등 해안마을로 소개되어 삶을 이어갔으나, 소개지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죽음뿐이었다.

9연대와 교체하여 들어온 국군2연대의 이호, 도두리에서의 집단학살을 두 눈으로 본 노형주민들은 소개지를 벗어나 노형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하천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다시 토벌대에 쫓겨 점점 깊숙한 산간지역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후 이들은 아흔아홉골, 어승생악, Y계곡 인근의 '청산이도' 까지 올라가 피신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둘째누님 작은 딸(당시 2세)을 업고 부모님을 따라 고냉이 동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 서리물케왓, 골머리(아흔아홉골), 선궤밭을 거쳐 청산이도(백록담 밑)까지 한겨울 동안 눈쌓인 한라산을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헤메고 다녔다.

다음해 3월 토벌대에 쫒기던 우리 동네 사람들은 한라산 정상근처 청산이도까지 올라가 남자들이 숨을 수 있는 바위언덕을 찾아보러 흩어져 나간 사이에 군인의 습격을 받은 부녀자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질쳤다.

나도 어린조카를 업은 채 엉겁결에 언덕 밑으로 뛰어내렸다. 요란한 총소리가 산울림과 어울려 천둥소리 같았고 계곡으로 날아온 수류탄 폭발에 꼼짝 못하고 바위틈에 숨어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아 좌우를 살펴보니 깎아세운 듯한 병풍바위를 오르려고 애쓴 어리석음을 알고 옆으로 돌아 가까스로 청산이도에 올랐다. 훗날 알았지만 그 날 밤새도록 오르락 내리락 하며 발버둥치지 않았으면 그 추위에 동상이 걸렸을 것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휩쓸고 간 청산이도 얼음판에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80세 넘은 할머니(현인호 조모)를 비롯한 많은 동네 어른들이 지금까지 견뎌온 보람도 없이 사살되어 여기 저기 하얀 눈 위에 쓰러져 선혈이 낭자했다."노형동 출신 현임종씨가 '노형지'의 수기에서 밝힌 피어린 피난생활의 증언이다.


피와 눈물의 세월을 견딘 노형 주민들은 1949년 봄, 정존에 성을 쌓고 복귀했다. 성에는 월랑, 정존, 광평, 월산마을 사람들이 마을별로 네 구역으로 나눠 살았다. 성 가운데에는 경찰출장소도 설치돼 돌담을 쌓고 경찰이 주둔했다. 노형주민들은 정존 마을 성에서 약 5년 간을 함바집을 짓고 살다 각 마을대로 복귀하게 된다.


노형동의 잃어버린 마을들은 급격한 도시화로 옛 모습을 잃은 채 개발의 중심에 놓여 있어 이전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드르구릉과 개아진이는 현재 과수원으로 변해 버려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당시 마을터였다는 것을 알만한 것은 돌담 사이로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대나무와 옛 올레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 노형동에서 가장 웃드르 마을이었던 드르구릉에는 노형동의 잃어버린 마을을 대표하여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어서 4 3으로 인한 노형리의 엄청난 피해를 엿볼 수 있다.


"이곳 제주시 노형동 드르구릉에는 이씨가 3백여년 전에 처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드르(들판)에 큰 구릉(연못)이 있었다는데서 붙여진 마을 이름처럼 귀한 식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 마을은 해방 당시만 해도 노형 2구에 속해 있었으며 16가호 80여 명의 주민들이 정을 나누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드르구릉 마을 사람들은 4 3의 와중에서 마을 전체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정든 삶터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고 부모 형제와 이웃의 희생을 눈물을 삼키며 지켜보아야만 하는 고통을 겪었다.

더이상 주민들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한 빈터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대나무만이 지키고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름드리 팽나무도 베어져 없어지고 그 깊고 큰 구릉도 메워져 버렸다.

어디 노형동에서 잃어버린 마을이 이곳 뿐이랴. 함박이 굴(32가호), 방일리(30가호), 개진이(26가호), 괭이술(41가호), 물욱이(19가호), 벳밭(30가호)도 4 3의 와중에 사라졌다가 최근에야 조금씩 사람들이 찾아와 삶터를 일구어 가고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 3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아래 사진의 긴 올레를 들어서서 가 보면 밭 서쪽에 집울타리 뒤쪽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담의 일부가 흔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구석구석에 사기그릇, 옹기그릇 등의 파편(위 사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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