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씨 삼승할망..함덕리 존나니모르당(불공할망당, 넋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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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씨 삼승할망..함덕리 존나니모르당(불공할망당, 넋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3.21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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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리에는 원래 13개의 신당이 있었지만 마을 당굿은 열리지 않는다

함덕리 존나니모르당(불공할망당, 넋산)
 

위치 ; 조천읍 함덕리 1698번지. 존하니모르(존나니모르, ᄌᆞ나니ᄆᆞ르). 조천읍 우회도로→함덕 SK LPG 옆길→남쪽으로 600m→동산 오르기 전 두 갈래 길에서 서쪽 좁은 길로 약 60m 지점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유형 ; 민속신앙(신당)

 

 


함덕리에는 원래 13개의 신당이 있었다고 한다. 1986년의 조사에서도 베남물당(급서왕하늘), 서물당(미륵조상), 당뒤(일렛또), 구멍도덕(일렛또), 네커리당(일렛또), 삼수를(일렛또), 존하니르당(일렛또), 벅세기도덕(여드렛또), 서모당(산신) 등 9개의 당이 있었다.


당이 많다는 것은 마을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마을의 물고․장적․호적․생산을 통괄하여 거느려야 하는 신의 역할의 분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함덕리는 마을 공동 의례로서 당굿이 열리지 않는다. 공동체적 집단의례로서 마을의 언로(言路)이며 집회소이자 성소인 당신앙을 통한 신앙공동체가 어느 시기에 약화되어 음성적인 개인신앙으로 변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을굿으로서의 당굿은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대물림한 당에 몰래 가서 개인적으로 비념 형식으로 의례의 성격이 변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어 뚜렷한 제일이 없다.

‘일렛또’ 또는 ‘일렛할망’이라고 해서 신의 성격과 제일을 암시하는 신의 이름이 원래의 제일을 추정하게 할 뿐 신앙민들이 제일을 지켜 당에 가는 것이 아니고 비념할 일이 생겼을 때 택일하여 당에 가는 것이 보통이다.

제일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집단적 의례의 성격이 약화되었다는 뜻이며 당세의 약화라고도 볼 수 있고 당세의 집중이 아닌 당세의 분산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 으뜸마을 함덕리」89쪽)


존나니르할망당은 고씨 삼승할망의 무덤이다. 불공할망당, 넋산, 넋당이라고도 한다. 함덕 사람은 물론 부산, 서울, 일본 등 국내외에도 영험이 널리 알려져 단골이 많다.

몸이 아프거나 우환이 닥친 때 여기에서 기도를 하면 하는 일이 잘 되고 심신이 편안하다고 한다. 넋들임과 질병 치료를 기원하는 데 이용되며 제일은 3일, 7일이고 지전을 비롯하여 제물로는 메 3기, 채소를 올린다.

요즘은 제일을 지키지 않고 택일하여 다니기도 한다. 지금도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은 치료용으로 옷을 보내는데 기도 후에 옷을 돌려보내어 그 옷을 입으면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

본인이 직접 가거나 마을에 있는 삼승할망을 모시고 가서 묘 앞에서 축을 고한다.(제주여성문화유적 166~167쪽) 돈을 내면 당을 관리하고 있는 정씨 할머니라는 분이 알아서 준비해 준다.

심방을 모시지 않고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직접 넋들이기를 해 주기도 한다. 입던 내의를 들고“넋들게 해 줍서, 넋들게 해 줍서.” 읊으면서 머리와 몸을 어루만져주는 형식이다.


묘 앞에 '孺人高氏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濟州東朝天面咸德里南尊閑伊旨有枕丁向癸三尺之原卽陽川許辰之妻耽羅高媼之藏也 제주 동쪽 조천면 함덕리 남쪽 ᄌᆞᆫ나니ᄆᆞ르(尊閑伊旨)에 정좌 계향(남남남서에서-북북북동 방향)에 조그만 原(무덤)이 있으니 바로 양천 허진(許辰)의 처 탐라고씨 할머니가 묻힌 곳이다.


生年月日文獻未徵癸丑七月二十六日圽 생년월일은 문헌에 검증(증명)할 수 없고, 계축년 7월 26일에 돌아가셨다.


有子內宗無育 아들 내종이 있었으나(또는 아들과 종친이 있었으나) 양육하지 못했다.(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斯人也寄而遺蔭歸而有靈一抔土前孰不崇拜 이 사람(우성집)이 의지할 때는 은덕을 베푸셨고 돌아가서는 신령함이 있으니 한 줌의 무덤 앞에 어찌 공경하여 절하지 않으리오.


淸香美醑遠近來酹 맑은 향과 좋은 술로 원근 사람들이 와서 제사를 지내도다.


愛我比兒圖報无量刊玆一石以表其情 자식처럼 나를 아끼신 은혜에 보답하기를 꾀하여도 끝이 없으니 이 하나의 돌에 새겨서 그 뜻(자신의 마음)을 나타낸다.


歲戊子三月上巳丹陽禹成集謹竪 무자년 3월 상사일(음력 3월 3일)에 단양 우성집이 삼가 세우다. 醑(美酒서) 酹(부을 뇌) 旡(목멜 기) 刋(끊을 천), 圽 죽을 몰

여기서 癸丑년은 1913년, 戊子년은 1948년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비문을 새긴 깊이가 깊은 것이고, 마을 주민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성범씨가 비석을 세운 것이 1900년 이전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후손이 아닌 우성집이라는 분이 비석을 세운 것을 보면 고씨 할머니에게는 성장한 자식이나 종친은 없고, 고씨 할머니의 은혜를 입어 자란 분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양계화씨와 김병석(전노인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묘의 관리는 우씨(우성집? 마을 주민들은 여성이라고 함)→한씨(우씨의 딸)→양계화(한씨의 딸)로 이어져 온다고 한다.(조나연씨 조사 자료)


봉분은 자그맣고 묘역도 좁지만 상석(床石), 향석(香石), 혼유석(魂遊石), 계절석(階節石) 등이 잘 갖춰져 있다. 상석은 2개가 놓여 있다.

상석 앞에는 돌을 평평하게 깐 다음 시멘트로 마감하여 배석(拜席)을 마련하였으며, 앞의 산담에 붙여서 다듬은 자연석 1단을 길게 깔고 시멘트로 마감한 시설이 있다. 물건을 놔 두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앉을 자리인 것 같다.


묘의 앞쪽은 겹담으로 산담을 했으나 뒤편은 산담 대신 외담울타리가 둘러져 있으며 동쪽으로 출입구가 나 있다.

묘역 안에 애기무덤 3기가 함께 있고 배롱나무 4그루가 자라고 있다. 술병들이 모아져 있고 울타리 내외가 깨끗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풀이〉존하니ᄆᆞ르(ᄌᆞ나니ᄆᆞ르)에 좌정ᄒᆞᆫ 고씨할마님. ᄌᆞ손(子孫)들 괴로완 ᄎᆞ자 오라수다. 이 ᄌᆞ손(子孫)은 넋들여 주곡 혼(魂) 들여 줍서. 자손에 생기 맞는 날.(무가본풀이사전)


"불쌍한 우리 손지들 와시난 할마님 넋들여 줍서, 좋게 해 줍서"(150930 KBS TV에 출연한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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