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본성과 간성 2중으로 축성..고산2리 신물동네(신수동)마을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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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본성과 간성 2중으로 축성..고산2리 신물동네(신수동)마을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3.24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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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주민에 대한 학살은 초토화작전이 시작되던 1948년 11월 10일 발생했다

고산2리 신물동네(신수동)마을성담
 

위치 ; 한경면 고산2리 신물동네(신수동) 북쪽 소나무숲과 대나무숲이 있는 밭울타리. KBS고산중계소가 있는 큰길에서 보면 다소 큰 귤나무가 보이는 집 울타리이다.
분류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4·3 사건 때 고산리는 1,2구로 나뉘어진 1천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1구에는 한장동과 자구내가 포함되어 있었고, 2구에는 신물동네(新水洞), 일곱도르(七田洞), 도눈동네(錢沓洞)가 속했다. 고산리에는 일제시대부터 고산지서가 있어 치안을 담당했다.


1947년 3월1일 삼일절 기념식에는 고산 청년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 후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집회에 참여했던 일부 고산 청년들이 경찰에 검거되었고, 이에 고산 청년들의 왓샤시위가 간간이 이어졌고, 1948년 2월 7일 2·7사건 직후에는 경찰과 청년들 간에 최초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48년 2월 11일 주로 2구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지서 앞에 모여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발포했고(고산에서의 최초 총기발포)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이 다리에 부상을 입고 검거됐다. 나머지 청년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고산 주민에 대한 학살은 초토화작전이 시작되던 1948년 11월 10일 발생했다. 토벌대는 고산지서에 수감됐던 고태붕 등 주민 6명을 현재 고산치과인 옛 논밭에서 공개총살했다. 그 후 고산에서의 인명학살은 주로 소개민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고산리의 중산간마을인 조수, 청수, 저지 등지의 완전소개는 1948년 12월 5일경 이루어졌다. 이들 중산간 주민들은 소개 첫날 머물렀던 고산국민학교에서부터 토벌대에 지명되어 학살되는 등 소개 기간 내내 몇몇씩 혹은 집단으로 희생됐다. 그 정확한 규모는 자료가 없어 증언만으로는 집계가 어려울 정도이다.


고산 주민들은 마을 방어를 위해 민보단을 조직하고 그 중 20~30세의 청년 70~80명은 군경토벌대의 토벌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대한청년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군경토벌대에 대한 고산 주민들의 많은 협조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산 주민 12명이 예비검속되어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희생되었다.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1949년 1월 20일부터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고산리의 축성은 1,2차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1차에 쌓은 성은 1구를 중심으로 1948년 12워 20일부터 고산 주민은 물론 소개민들이 총동원되어 약 1개월간의 노력으로 완성됐다. 그 후 1차로 쌓은 성에 포함되지 않았던 신물동네, 일곱도르, 도논동네, 한 장동은 각 동네마다 별도로 성을 쌓았다.(제주4·3유적Ⅰ 851~853쪽)


신물동네에서는 본성과 간성 2중으로 축성하였다. 본동 동쪽 고사리오름 동네에서 항냇물 동쪽 신물 쪽 500m까지 간성을 쌓았고, 항냇물 동쪽 새동네 쪽 300m 지점까지 제1간성을 쌓았다.

별성으로는 신물동네, 일곱도르, 도논동네에 성을 둘렀다. 여성들도 이 일에 동원되었고 후에는 밭일을 하면서 조(組)를 짜서 저녁 6~7시부터 다음날 7~8시까지 한 조에 2~3시간씩 보초를 섰다. 이에 앞서 1948년 10월 8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2월 21일 민보단이 조직되었다.

고산리에서도 자위책으로 15~60세의 청년과 처녀들을 모아 민보단을 조직하여 자체 방위에 임했었다. 현재 성담은 신수동(김석 거주)에 100여m가 남아 있다.(제주여성문화유적 6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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