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마을수호신을 지칭..삼도2동 여단 ·성황당터
상태바
[향토문화]마을수호신을 지칭..삼도2동 여단 ·성황당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3.27 0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돌아가 쉴 곳 없는 귀신인 여귀를 모시는 제사를 여제라고 한다

삼도2동 여단 ·성황당터
 

위치 ; 삼도2동 1146번지 탑동로167
시대 ; 조선
유형 ; 민속신앙

 


돌아가 쉴 곳 없는 귀신인 여귀를 모시는 제사를 여제라고 한다. 이 제사를 모시는 제단이다. '여(厂+萬)壇'은 사전을 찾아보면 '서낭신과 主人 없는 神에게 祭祀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되어 있다.


성황신앙은 본래 중국 북제(北齊)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크게 활성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황신의 내력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 신사를 설치하여 위엄 있게 숭배하였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수호신으로서의 성황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신앙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성황은 국행(國行) 성황과 민간에서의 성황으로 나누어진다.

국행 성황에는 호국이라는 두 글자를 붙였다. 그런데 제주 지역의 경우, 어느 때부터 성황사가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성황은 마을 수호신을 지칭하는 말로 서낭이라고도 한다.


성황단이란 조선시대 공사(公祀) 중에서 소사(小祀)의 하나인 성황신에게 제를 지내는 단을 말한다. 원래 성황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도성을 지켜 주는 신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일종의 토속신으로 변하여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성황단의 사전적 표현은 비, 바람, 구름, 우레를 맡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특정한 신상을 모시는 경우에는 성황당이라 하였으며 그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성지역으로 제단을 마련하고 수시 또는 특정한 날짜에 제사를 올리는데 서낭단 서낭신 등 동일한 어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황이라는 것은 원래 성지(城池)의 뜻에서 성지로 둘러싸인 성읍의 수호신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주(州)성황신사(城隍神祠)제도는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고려 문종(1947~1082) 때 新設 성진(城鎭)에 성황신사를 두기 시작한 것이 차차 전국에 시행하게 되었다 한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를 계승하여 태조 때에는 모든 산천과 성황신에 봉호(封號)를 내리게 되고 이후 공의(公儀)로서 계속되었다.(울산광역시중구향토사연구소)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성황당·성황사·성황신묘·성황신사 등으로도 부르는데, 이러한 명칭은 성황단과 같은 뜻이다. 육지에서는 서낭단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세종실록에 ‘전주의 성황단(城隍壇) 위판은 전주성황지신(全州城隍之神)이라 쓰도록 한다’는 기록(세종19년(1437)3월13일)과 ‘여제는 성황단(城隍壇)에서 발고(發告)하고, 북교단(北郊壇)에서 제사를 행한다.’는 기록(세종22년(1440)6월29일)이 있다.

서울의 남교(南郊) 청파역(靑坡驛) 부근에 있었으며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淸安面) 문당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낭당은 2002년 7월 12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거창 거기리, 안동 서지리, 울산 우정동, 영덕 창수면 등에 성황단이 남아 있다.


지방의 주(州)나 현(縣) 관아에서 공식적으로 거행하는 정규적인 제사로 삼단일묘(三壇一廟)가 있었다. 세 개의 단은 사직단(社稷壇), 성황단(城隍壇), 여단(祣壇)이고 한 개의 묘는 문묘(文廟), 즉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삶의 공간 한가운데에 행정의 중심지인 치소(治所)를 두고, 동쪽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 서에 사직단, 북에 여단, 남에 기우단(祈雨壇)과 마을 공동체의 으뜸 신인 성황(城隍)을 모시는 성황단을 두는 것이 과거 공간구성의 기본 틀이었다.(경남도민일보 2012.02.28.)

성황신은 모든 임자 없는 귀신을 관장하는 신으로 일년에 한번 제사를 지냈다. 수령이 직접 行祭하기도 하고 예감(禮監)을 시켜 대신하도록 하기도 했다.


성황제의 헌관(獻官)은 제주목의 경우에는 제주판관이, 대정·정의 양현의 경우에는 현감이 주관하였는데, 특히 대정현에서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뱀을 성황신으로 모시는 사례가 확인되기도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여단(祣壇)은 '후손이 없어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는 귀신(無祀鬼神)'인 여(려)에게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자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 했던 유교사회에서 제사를 받들 후손이 없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었다.

여단에서 지내는 제사인 여제(祣祭)는 그 기원을 고대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태종 때 유학자 권근(權近)의 건의로 처음 시행됐다.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은 원한을 가지고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하여 잊히고 버려져 울분과 슬픔에 차 있는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이다.


여제의 대상인 여귀(祣鬼)는 횡포를 부릴 수 있는 포악한 귀신으로, 칼에 맞아 죽은 자,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얼고 굶주려 죽은 자, 전쟁에서 죽은 자, 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 난산(難産)으로 죽은 자, 벼락 맞아 죽은 자, 천재(天災)나 질병으로 죽은 자, 죽은 뒤에 자식이 없는 자 등 15위(位)가 제사의 대상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제가 가장 많이 실행된 경우는 바로 '질병'이다. 그 중에서 특히 전염성이 있는 질환은 여귀가 일으키는 재난 가운데 가장 큰 것이어서, 국가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여 죽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여제가 많았다.

이 귀신들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불행의 목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매우 부정적이다. 그래서 전국에 여단을 설치하고 매년 봄 청명일(淸明日)과 가을 7월 17일, 10월 1일 세 차례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서울에서는 왕이 직접 제사하고 지방에서는 반드시 그 지방의 수령이 직접 제사를 관장하게 하였다.(경남도민일보 2012.02.28.)


표석에는 '城隍堂·여壇터'라고 되어 있다. 성황당과 여단이 있었던 터이다. 성황사는 원래 주남 16리 한라산 아래 있었으나 뒤에 서문 밖 2리 지점(이곳)으로 옮겨 여단 옆에 설치되었다.

성황당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에게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가 봉행되었으며, 여단에서는 못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 등 제사를 받지 못하는 여귀(여鬼, 돌림병을 옮기는 귀신)들을 위하여 봄·가을·겨울에 걸쳐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도 왼쪽 하단에 뚜렷이 표시되어 있다. 지금은 이곳에 삼도2동 포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작성 090103, 보완 12032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