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동척회사..건입동 주정공장(무수주정제주공장)&육군제5훈련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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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동척회사..건입동 주정공장(무수주정제주공장)&육군제5훈련소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3.28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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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수탈..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위한 기관이었다.

건입동 주정공장(무수주정제주공장)&육군제5훈련소터

 

◆ 주정공장옛수로.
◆ 주정공장옛수로.
◆ 포맷변환_건입동_주정공장(오마이뉴스)
◆ 건입동_주정공장(오마이뉴스)

 

 

주정공장(無水酒精濟州工場)(Jeju Plant of Absolute Alcohol)
위치 ; 제주항 여객선터미널 맞은편 동쪽 언덕 위 아래가 옛 주정공장이 있던 자리인데, 공장 부지 중 언덕 아래는 무수주정 제주공장이 있던 자리이며 언덕 위에는 고구마 창고 10여 개가 있었다.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산업시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 제주항 근처에 건립하여 운영하였던 주정(酒精) 공장터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동양척식, Oriental Development Company)는 일본 제국이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이다. 간단히 줄여서 동척(東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필자는 할아버지로부터 '동척회사'라는 용어를 들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1908년 제정한 동양척식회사법에 의해 세워졌다. 자본금 1,000만 원이며 조선은 설립자본금의 30%에 해당하는 국유지를 출자했지만 주요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로부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토지와 금융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의 식민지 개척 및 활동을 돕는 것 곧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의 착취를 위한 기관이었다.


1909년 1월부터 대한제국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원래는 대한제국, 일본의 양쪽 국적의 회사였으나 1917년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일본 국적의 회사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에 지점들을 두었다. 소유는 일본인에 한하였으며 활동지역은 이후 만주까지 확대되고 1938년부터는 다른 식민지인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영업지역이 확대되었다. 1938년에는 9개 지점과 831명의 직원을 두었다. 조선인 간부로는 부총재 민영기와 이사 한상룡이 있었다.


농업 토지의 매매, 임차, 경영, 관리, 건물의 건설, 매매, 대차 그리고 특히 오단백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얼마 안 되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일본 소작인들의 한국으로의 이민을 지원하는 동척농업이민계획을 펼쳤으며, 조선 각지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하고 정착을 위한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대표적인 기관이 되었다. 1917년까지는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 이주, 농업경영, 토지경영, 토지개량, 임업경영이 주력 사업이었지만 1930년대 이전까지는 금융 사업을 확장하면서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는 1916년 쌀폭동이라고 불린 식량 부족에 따른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조선에서의 식량 수탈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고대 로마 제국과 근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일본의 평화 곧 일본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식민지를 수탈하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광업 부분으로 확장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공업을 지원했다.


처음 한국으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자본으로 출자를 받은 후 토지 매입으로 1913년까지 4만 1,148정보를 매입하였으며 조선 총독부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으로 국유지불하에 의해 1917년말 7만 5178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되었다.

이후 계속 늘어나서 1942년말에는 20만722정보를 소유했다.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 수탈에 앞장서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조선인으로부터 수탈한 토지를 기반으로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한국 각지에 정착시키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1917년까지 매년 1천호, 1926년까지는 매년 360호정도의 이민을 받아 1926년까지 9,096호가 한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지원 아래 직접 경작하기보다는 지주가 되어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했다.


1920년대 이후 광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투자사업을 확대하여 동척계라 불리는 기업집단이 되었다. 1945년에는 이러한 회사가 52개사에 달했다. 이 중에는 조선유연탄, 동척광업, 비봉농사, 북선개발, 삼화광업, 조선아연광업, 조선도시경영, 해남농사등이 있었다.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한국을 지배한 미군정은 1945년 9월 25일 제정된 "패전국 소속 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의 건"과 1945년 12월 6일 제정된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에 의해 모든 한국내 일본인 소유재산(적산)은 미군정청 소유가 되었다.

이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유재산을 인수 개편하여 "신조선회사"로 개명하였으며 1946년 2월 21일, 신한공사(新韓公社)를 창설하였다. 이회사의 소유경지는 한국 논밭 경지의 12.3%에 달했으며 소속된 소속농가는 58만7974호로 전체농가 217만 2435호의 27.1%였다.

1948년 3월 22일에는 중앙토지행정처로 바뀌었다. 이후 미군정에서 소유하던 토지는 토지개혁을 통해 한국 농민들에게 귀속되었다.(위키백과)

주정공장 터는 지금 현대아파트 건물이 있는 곳과 그 아래이다. 1940년 1만여 평(43,685㎡)의 부지에 7,580㎡ 규모로 착공하여 1943년 완공하였다. 제주주정주식회사 상단은 고구마 창고 건물들이 있었고 그 하단은 주정공장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지사에서는 일본 전역에 주정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동양 제일의 시설 규모라고 자랑하였다. 빼때기를 발효시켜 증류하면 95% 농도의 무수주정(알코올)을 얻는데 물로 희석하면 소주가 된다.

이곳에서 제조된 주정은 전국 술 공장에 보급되었다. 제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 설탕 강냉이 등을 가지고 주정, 즉 알코올을 제조하여 이를 군사용 비행기의 연료로 보급하기 위해 건립되었던 것인데, 항공연료인 부탄올과 아세톤을 생산하여 일본군에 납품하였다. 1944년말에는 도내의 자동차 연료로도 공급하였다.


이때부터 제주 지역 농가에서는 얇게 썰어 볕에 말린 절간(切干) 고구마(속칭 빼때기) 생산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한 관(3.75㎏)에 30원을 주고 수매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에 들어서자 고구마공출(사실상 강제수탈)을 강요하여 농민을 괴롭혔다.

그리고 바로 옆에 주정공장이 있었을 때는 취수탑을 세워 ‘지장깍물’을 송수하여 썼다고 한다. 금산수원지 채수원에서 10미터 이내 지점에서 흐르는 물이 ‘지장깍물’인데 옛날에는 바닷가 포구였다. 상․하단을 잇는 수로와 계단으로 된 통로도 있었다.


총 6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였으며 연간 14,940㎘의 알코올 원액을 생산했으며, 발전기 3대는 연간 42,000톤의 무연탄을 소비하여 매일 1,400kw의 전력을 생산하면서 공장은 물론 건입동 일대의 가옥에도 전기를 공급했다. 공장 간부였던 홍성무씨의 증언에 따르면 공장 상부와 하부를 잇는 통로 계단 중간에 동굴 모양의 방공호를 설치하여 4계절 내내 12℃를 유지하여 냉저장고로 이용했다고 한다.

옥상에는 대공감시를 위해 큰 종을 달고 공습시에는 경보를 울렸다. 산지항에서 공장 상부까지 레일을 깔아 고구마와 무연탄을 운반하는 시설도 갖췄다. 산지항을 통해 입출하되는 화물의 50% 이상이 주정공장에서 나올 정도였다. 미군의 공습으로 공장 일부가 파손되어 가동이 일시 중단된 적도 있었다.(제주일보 130805)


위 사진에 나온 시멘트 시설은 공장 터 상단의 ‘사장밭’ 지역의 물골을 모아서 공장으로 흐르도록 한 도수관이었으며 이 물로 고구마를 씻었다고 한다. 윗부분은 철망을 설치하여 오물이 들어가는 것을 걸러냈고 내려가는 지점에는 뚜껑을 설치해서 물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하단 중앙에 있는 큰 돌을 들어내면 집수구를 볼 수 있다. 공장과 창고를 연결하는 계단은 현대아파트 105동이 들어선 곳의 맨 왼쪽에 있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는 제주농업학교가 학생들의 제1실습지로 정해 현 제동초 교지에서 옛 주정공장 근처까지 몇 만평을 보통 작물포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방 후 무수주정 제주공장은 미군정에서 신한공사(新韓公社)를 통해 접수하여 계속 관리하다가 1946년 3월 신한공사가 해체된 이후 미군정청 상공부로 이관되었다. 당시 무수주정 제주공장에 보관된 절간 고구마를 배급하여 도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장에 있던 발전기를 이용하여 전력도 보급하였다.


1948년 제주 4․3이 발발하자 군부대는 주정공장을 접수하여 처음에는 무기를 제조하는 조병창(造兵敞) 시설로 이용하였다. 4․3 관련 수용소로는 농업학교 천막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1948년 가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이후에는 농업학교 천막만으로는 수용소 시설이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겨울부터 고구마를 저장하던 무수주정 제주공장 언덕 위의 10여 개 창고를 수용소로 쓰기 시작하였다. 시설이 대규모이다보니 나중에는 제주 지역 내 최대의 수용소가 되었으며, 특히 1949년 봄부터는 수용소(일명 ‘갱생원’)하면 무수주정 제주공장을 가리킬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대 주정공장은 민간인이 운영하면서 전국 각지에 공업용, 의약용, 음료용으로 알코올 원액을 공급했다. 1959년 부산 대선발효공업(주)이 운영할 당시 냈던 세금은 제주도 총잡세액의 50%를 넘을 정도로 제주도에서는 가장 큰 기업이었다.


1950년 7월말에는 육군 제5훈련소(소장 金炳徽 대령)가 이곳에 설치되기도 했었다.
1951년 1월 무수주정 제주공장은 이종열에게 불하된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가 1973년 1월 천마물산이 인수하여 진로주조에 임대하였지만 오폐수 처리에 따른 과다한 비용 및 원료 구입 문제 때문에 조업이 자주 중단되었다.


결국 1983년 조업이 완전히 중단됨에 따라 1989년 5월 12일 공장의 상징인 굴뚝이 해체되었다. 천마물산은 1993년 공장 대지에 3,293㎡ 규모의 창고를 건립하였으며 고구마 저장 창고가 있던 부지에는 아파트 8동을 건립하였다.


고봉만은 이 공장이 남한에서 제일가는 주정공장이며 굴뚝이 50m나 되어 한라산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주정공장 굴뚝이었다고 설명한다. 건입동 작은 마을 속 여기저기 공장들이 많아 그런대로 밥 벌어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일손이 모자라서 거기가 일 하면 일당들 주었기 때문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고구마, 감자 심으라고 한 걸 수확하면 주정공장의 주원료인 고구마를 공출바치랴 자기 먹을 것 벌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회고하였다.


북쪽 절벽에 작은 방공호가 있다. 주정공장에 근무하던 일본인 임원들은 건입동 1106-5번지 일대 제주동초등학교 서쪽 지역에 사택을 짓고 살았다. 지금도 이 동네 이름은 사택동네이다.

1950년 7월16일에는 육군 제5훈련소(소장 金炳徽 대령)가 주정공장 터에 긴급설치되었다. 제주도의 청년들이 1950년 3월 1일 충남 온양의 육군방어사관학교에서 1개월간의 훈련을 마치고 육군예비역소위로 임관하여 돌아온 4월 제주도에서는 청년방위대가 조직되어 각급 지휘관 및 참모로서 활약하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시체제를 확립하여 신병을 모집하고 훈련을 시킴으로써 제5훈련소 창설의 기틀이 되었다. 제1교육대가 모슬포, 제2교육대가 한림, 제3교육대가 서귀포 주정공장, 제5교육대가 제주농업학교에 각각 설치되었다.


제5훈련소에 입소한 장정이 약 1만명이 되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피난민이 포함되기는 하였으나 거의가 제주도출신 청년들이었다. 육군방어사관학교 제주 출신 예비역장교 중 185명이 훈련소 신병훈련 교관으로 복무하였고 현역장교로 소집되어 제5훈련소의 기간장교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이때 고급장교와 하사관 등 일부기간요원을 제외하고 소대장, 중대장이 되어 직접 훈련을 담당하였던 교관과 훈련병을 주축으로 보병제11사단을 창설하고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1950년 8월 14일 창설)와 부산의 제3훈련소, 제주의 제5훈련소를 통합해 1951년 3월 21일 육군의 단일 신병훈련소인 육군 제1훈련소(소장 백인엽 준장)가 제주도 모슬포에 창설되면서 해체되었다.(실록제주백년사, 제주도지2권)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전국에 제1훈련소(소장 백인엽 준장, 대정읍 상모리)부터 제7훈련소까지 존재하였다. 제2훈련소는 충청남도 논산에, 제3훈련소는 경상남도 거제도에 있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제2훈련소를 제외한 모든 훈련소가 폐쇄되고, 1999년 2월 1일 육군훈련소로 개칭되었다.


1989년 공장의 상징이었던 굴뚝이 철거되었고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다.
《작성 090107, 보완 120919,1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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