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천연 봉천수물통..월림리 움부리물(봉천수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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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천연 봉천수물통..월림리 움부리물(봉천수연못)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3.31 0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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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40년 전까지도 약100호 이상이 이 물을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월림리 움부리물(봉천수연못)
 

위치 ; 월림리 마을 중심부
유형 ; 수리시설(봉천수)
시대 ; 조선~

 

 

 


한림읍 월림 마을 한가운데는 움부리물이라고 불리우는 봉천수가 있다. 돌로 둥그렇게 담을 쌓고 주변이 빗물이 흘러 고이게 된 천연 봉천수물통이다.

한쪽에는 조그만하게 식수통을 두고 나머지는 다목적으로 이용되었었다. 월림마을 지경은 예로부터 물이 귀한 곳이다. 때문에 마을도 없었고 숲이 우거지고 짐승들이나 터 잡아 살던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해 한림읍 낙천마을에 가난하게 살고 있던 고씨할아버지가 월림리 지경에 이르렀다. 주변은 우거진 잡목과 보잘 것 없는 황무지만 반길 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물도 없는 곳에 무슨 산짐승들인가 싶어 혹시 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월림마을 일대를 헤매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거진 숲속에는 푸르고 맑은 물이 고여 조그만 호수를 이루고 있는 데가 눈에 비쳤다.

고씨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웠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에서 넓은 농토를 마련하고 살 수 있겠다 싶어 고여있는 물을 마시고 물가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산짐승들이 떼를 지어 물을 마시러 오는 것이 아닌가.

고씨 할아버지는 얼른 몸을 숨기고 살펴보니 사슴·노루·산돼지 등 계속하여 물을 마시고 가는 것이었다. 근처에 물이라곤 전혀 없기 때문에 짐승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고씨할아버지는 이곳에 숨어서 사냥을 했고 그것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


그후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이름을 음부리(音富里)라 했고, 물이름을 음부리물이라고 했다. 움부리물 주변으로 저지,금능,협재,한림,상명,산으로 연결된 여섯개 도로가 집결되어 있다.

이는 움부리물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금은 도로도 협소해지고 물도 흐려졌지만 약 30~40년 전까지도 약100호 이상이 이 물을 이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http://cafe.daum.net/cstour)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움부릿물은 설촌과 함께 유입인구가 크게 늘어 물부족 현상이 나타나자 물빠짐을 막기 위해 1807년께 대정읍 무릉리 안창동 지경의 찰흙을 운반해 바닥을 다졌다. 이후 음부릿물은 수심 1∼2m를 유지하며 물이 마르지 않는 못으로 이름나기 시작했다.

또 음용수로 쓸 목적으로 1936년께 인근에 알통물을 파게 되자 움부릿물은 우마급수장과 목욕통으로 활용됐다. 1968년 어승생 물을 끌어들여 상수도가 개설됨에 따라 쓰임새를 차츰 잃기 시작했고 1980년 중산간도로가 확장·개설됨에 따라 음부릿물 일대 200평이 도로에 편입·매립되었다.

월림리는 이와 함께 우마급수도 상수도에 의존하게 되자 이후 움부릿물에 대해 200평을 추가 매립해 소공원을 조성함으로써 원형을 잃은 상태다. 이 마을에 사는 김공필씨(75)는 “어릴 때는 사내아이들이 헤엄을 쳐 음부릿물 한 바퀴를 돌아야 비로소 사내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못이 매우 컸다”고 회고했다.

현재 이곳에는 여뀌·기생여뀌·사마귀풀·비녀골풀·도꼬마리·병아리방동사니·참방동사니·알방동사니 등의 식물과 소금쟁이·붕어가 서식한다.<취재=좌승훈·좌용철 기자·사진=조성익 기자>(제민일보 000910)
《작성 090110, 보완 1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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