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철도경찰 10여명 향사에 주둔 주민 괴롭혀.. 명월리 중동성담
상태바
[향토문화]철도경찰 10여명 향사에 주둔 주민 괴롭혀.. 명월리 중동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4.02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월리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제주도 서부 지역의 행정·교육·군사적 중심도시였다.

명월리 중동성담
 

위치 ; 한림읍 명월리 1987-1번지 일대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명월리는 한림읍 중산간마을이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제주도 서부 지역의 행정·교육·군사적 중심도시였다. 지금의 동명리·상명리도 모두 명월리에서 분리된 마을들이다.


1948년 5월 14일 한림지서를 습격하고 돌아가던 무장대는 명월리를 거쳐 가면서 당시 독립촉성국민회 간부이고 전 한림면장인 임창현 가족 4명과 한림면사무소 총무계장 진윤종, 산업계장 진한종, 재무계장 진홍종 형제를 납치해 살해하였다.

이 사건 이후 마을 청년들은 낮에는 야산에 숨었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갔다.

1948년 8월~11월에는 철도경찰 10여명이 향사에 주둔하면서 걸핏하면 주민들을 잡아다 '남로당에 들지 않았느냐?' '민애청에 들지 않았느냐?' '산에 쌀을 올리지 않았느냐?'고 취조하면서 두들겨팼다. 젊은이들이 숨어 버리자 여성들과 노인들이 고초를 당했다.


1948년 11월 20일에는 소개령이 내려지고 집은 전소되었다. 소개지에서도 무사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던 주민들은 마을 주변을 숨바꼭질하듯 숨어 다니다 토벌대에 붙잡혀 살해되었다.

해안으로 소개된 사람들은 무장대의 1948년 12월 3일 금능리 습격, 1949년 1월 3일 협재리 습격 다음날 한림국민학교로 끌려가 인근에서 희생되었다.

그러자 명월 주민들은 차라리 옹포공장에 수감시켜 달라고 해서 스스로 수감되었다. 그러면 무장대가 어느 마을을 습격한다 해도 자신들이 의심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량부족과 추위로 희생되는가 하면 어린이들은 홍역으로도 희생되었다.


1949년 봄에 명월상동에 성을 쌓고 금악, 상명 주민들이 함께 복귀했다. 그러나 인구가 가장 많은 중동은 1950년 봄이 되어서야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성은 이 때 쌓은 것이다.


명월리 마을 서쪽에 사삼 당시 쌓은 성담이 남아 있다. 포제단을 서쪽으로 감싸고 있는 높이 2m 정도의 담이 바로 사삼 때 쌓은 성의 일부이고 길 건너 남쪽으로도 일부가 남아 있다.

밑폭은 1m, 윗폭은 50cm 정도이며 길이 100m 정도가 남아 있다.(2003년 제주4·3유적Ⅰ 807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