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평화의 섬은 어떻게 평화를 배신 하는가.."
상태바
"세계평화의 섬은 어떻게 평화를 배신 하는가.."
  • 고현준
  • 승인 2020.04.10 17: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송강호에 대한 구속을 바라보며’ 성명 발표

 

 

“2012년 3월 7일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강행을 위해 제주의 몇 안되는 절대보전지역 중 하나였던 구럼비 해안의 발파가 시작된 날이다.

당시 제주 정치인들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반대했으나 강행된 발파는 두 달여 진행되었고 국제평화활동가들도 포함한 시민들이 육상과 해상에서 강하게 발파에 저항했다.

구럼비를 지키고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군사기지 건설을 막는 것은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 시민들의 사명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육지 응원 경찰까지 동원된 진압과정에서 작년 5월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표했듯 많은 인권침해와 환경파괴가 있었다.

그해 4월 3일 저녁, 소설가 현기영은 64년 전 4.3 대학살이 강정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며 개탄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낮에 송강호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 해 4월 1일 구럼비 발파에 항의하며 구럼비로 들어간 송강호는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체포되었다. 8년 전의 일이다.”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10일 '송강호에 대한 구속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이 단체는 “올해 2020년 3월 7일 제주해군기지 안을 들어갔다는 이유로 해군에 의해 고발되었고 3월 30일 구속 영장을 발부 받았다”며 “4,3 72주년이 되는 지난 4월 3일 구속적부심에서 구속이 유지되었다”고 밝혔다.

성명은 특히 “2005년 정부가 지정한 세계평화의 섬 선언은 또한 4.3 의 원인에 대한 언급없이 다만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 시킨다는 극히 추상적인 말로 4.3의 과제를 더욱 미궁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언된 ‘평화’는 따라서 극히 불안하게 휘둘리게 될 것이었다”며 “2005년 세계평화의 섬 선언은 그렇게 세계평화의 섬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었고 2013년 창립된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러한 모순을 인식하며 창립되었다”고 강조했다.

성명은 “3월 7일 구럼비 발파 8주년에 기지 안에 들어간 송강호와 류복희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라며 “4월 3일 하필이면 4.3 72주년에 구속적부심사에서 구속이 유지된 송강호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성명(전문)을 그대로 옮긴 내용이다.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성명서(전문)

 

세계평화의 섬은 어떻게 평화를 배신 하는가

-송강호에 대한 구속을 바라보며-

 

여기 한 시민, 송강호가 있다. 그는 올해 2020년 3월 7일 제주해군기지 안을 들어갔다는 이유로 해군에 의해 고발되었고 3월 30일 구속 영장을 발부 받았다. 4월 3일 구속적부심에서 구속이 유지되었다.

많은 언론은 그가 왜 3월 7일 그 곳에 들어갔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4월 3일 그의 구속이 유지되었을 때 그 날이 마침 4.3 72 주년 이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많은 언론들이 해군기지 경계 소홀에 대한 국방부의 질책과 대책 만을 받아쓰기 바빴다. 단지 기지 안에 미미하게 남아있는 구럼비를 보고자 했던 송강호는 국가 안보의 구멍을 뚫은 범죄자로 그려졌다. 질문 없는 기사들은 사람들이 사건에 대해 질문할 여지들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나 시민의 권리와 의무로서 질문해야 한다. 그는 그 날 왜 그 곳에 들어갔는가? 기지로부터 나오기 전 그가 들은 깃발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섬’ 그리고 함께 들어간 그의 동료 류복희가 들은 깃발, ‘구럼비야 봄 잠 잘 잔?’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시사하고자 했는가? ‘평화와 인권’ 두 단어가 기원되는 4.3 추모 기간에 그에 대한 구속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2년 3월 7일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강행을 위해 제주의 몇 안되는 절대보전지역 중 하나였던 구럼비 해안의 발파가 시작된 날이다.

당시 제주 정치인들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반대했으나 강행된 발파는 두 달여 진행되었고 국제평화활동가들도 포함한 시민들이 육상과 해상에서 강하게 발파에 저항했다.

구럼비를 지키고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군사기지 건설을 막는 것은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 시민들의 사명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육지 응원 경찰까지 동원된 진압과정에서 작년 5월 경찰청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발표했듯 많은 인권침해와 환경파괴가 있었다.

그해 4월 3일 저녁, 소설가 현기영은 64년 전 4.3 대학살이 강정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며 개탄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낮에 송강호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 해 4월 1일 구럼비 발파에 항의하며 구럼비로 들어간 송강호는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체포되었다. 8년 전의 일이다.

2016년 제주해군기지는 완공되었지만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흐름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2017년 미 이지스 구축함등 외국 군함들이 드나들더니 그 해 11월에는 미핵잠수함이 그리고 마침내 2018년에는 미핵항공모함이 국제관함식을 구실로 제주해군기지에 입항했다. 4.3 70주년이 되던 해였다.

2005년 1월 27일 제주는 세계평화의 섬 으로 지정되었다. 선언에 의하면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가 삼무(三無)정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며, 평화정착을 위한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제12조의 규정에 의하여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이 세계평화의 섬 선언에는 1991년부터 그 후 10년 이상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러번 거론된 ‘비무장’ ‘비핵’ ‘중립화’의 단어들이 담겨있지 않았다.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창립 취지문에 의하면, 1991년 제주국제협의회에 참여한 세계 여러 나라 정치 전문가들은 평화의 섬에 대한 다섯가지 주요 원칙을 정립했는데 그 중에 첫번째는 제주도가 비무장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2000년 12월 제주발전연구원은 <제주 평화의 섬 모형정립과 실천방안>을 제출하여 "동북아 국가 간의 이념 및 군사적 대립구조의 역학관계 속에서 제주가 군사적 대립과 전쟁 개입 가능성을 예방하고 한반도 내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최소한 '중립화' 또는 '비무장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2003년 10월 10일, 제주대 평화연구소<세계평화의 섬 지정과 발전방안에 관한 워크샵>에서는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함으로서 ‘평화지대’ 역할을 요청하고 또한 제주도를 ‘비핵지대화’ 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제주 평화의 섬 정책 최초 입안자 였던 문정인 교수는 2001년 4월 제주를 '평화지대' 로 선포할 것을 제안하면서, 제주의 '비군사화(비무장화)'와 '중립화'를 국제적으로 선언할 것과 "장기적으로 군사목적의 선박 및 항공기의 기항과 기착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추진 원칙을 내놓기도 했다(위 취지문 참조)

그러나 이렇듯 비무장화 및 비핵으로 출발한 세계 평화의 섬 논의는 2005년 한미군사동맹이 강조되는 가운데 왜곡과 변절의 길을 걸었으며 문정인 교수를 비롯한 학자 및 정치인들은 평화의 섬과 해군기지가 양립가능하다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2005년 1월 27일 제주도민 스스로 아닌 정부에 의해 지정된 세계평화의 섬은 이미 세계평화의 섬 논의 초기의 정신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도민의 목소리, 뜻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선언은 또한 ‘제주4.3의 비극’의 원인을 묻지 않았다, 다만 그 실체가 애매모호한 화해와 상생’이 언급되었다. 아마 가장 치명적인 것은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에 의하여 라는 대목 일 것이다.

1991년 제주도개발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제주 청년 양용찬은 그 해 11월 7일 이를 반대하며 분신했다.(그러고 보니 구럼비는 그가 죽은 1년후인 1992년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중앙정부와 제주도정은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을, 2006년에는 위 둘을 합쳐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지정된’ 세계평화의 섬은 제주국제자유도시라는 외피를 쓰고 나왔다, 그것은 자본과 개발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었다.

제주해군기지는 민군복합관광미항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법은 세계평화의 섬 지정과 관련된 부분에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관련 지역발전계획 수립’을 버젓이 넣었다. 비핵 비무장으로 출발한 세계 평화의 섬 논의가 엉뚱하게도 그 반대인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 ‘평화’에 대한 개념이 이리도 극도로 왜곡되고 변절되었다.

세계평화의 섬 초기 논의에 의한다면 당연히 온 제주도민들이 반대해야하는 제주해군기지가 정반대로 ‘평화의 거점’(2018, 10, 11, 문재인 대통령 연설 중 )으로 둔갑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다는 ‘상무 정신의 전통’은 ‘창조적으로 계승’될 것이 아니라 자본의 힘 아래 유물로 박제화될 것이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에서 보듯 군(무장)은 자본과 기꺼이 만났고 그것이 ‘평화’라고 둔갑되었다.

2005년 정부가 지정한 세계평화의 섬 선언은 또한 4.3 의 원인에 대한 언급없이 다만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 시킨다는 극히 추상적인 말로 4.3의 과제를 더욱 미궁으로 몰아넣고 있다.

선언된 ‘평화’는 따라서 극히 불안하게 휘둘리게 될 것이었다. 2005년 세계평화의 섬 선언은 그렇게 세계평화의 섬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었다. 2013년 창립된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러한 모순을 인식하며 창립되었다.

3월 7일 구럼비 발파 8주년에 기지 안에 들어간 송강호와 류복희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4월 3일 하필이면 4.3 72주년에 구속적부심사에서 구속이 유지된 송강호는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세계평화의 섬은 어떻게 평화를 배신했는가?

군사기지 없는 비무장, 비핵 평화의 섬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질문되어야 하는가?

2010년 4월 10일

비무장평화의 섬 제주를 만드는 사람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