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 특유의 ‘아기장수 설화’ ..안덕면 서광리 오찰방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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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 특유의 ‘아기장수 설화’ ..안덕면 서광리 오찰방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4.1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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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장사여서 씨름판에 나서면 이길 장사가 없었는데 누님만은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안덕면 서광리 오찰방묘

 

위치 ; 안덕면 서광리 519번지. 소인국공원 동북쪽 농로 200m 정도 들어간 남쪽 밭
시대 ; 조선
유형 ; 무덤

 

 


우리나라에 처음 吳氏가 들어온 것은 신라 지증왕2년(501)이다. 중국에서 신라 영역인 남해도에 닿아 왕명으로 함양에 거주하게 된 수군대도독 오담(吳膽)이 우리 나라 오씨의 도시조(都始祖)이다.

膽의 24세손인 賢輔, 賢佐, 賢弼 3형제가 거란의 침입 때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출전하여 연주(延州)에서 거란군을 물리치니 그 전공으로 賢輔는 海州君에 봉해지니 海州吳氏의 시조가 되었고, 賢佐는 同福君에 봉하니 同福吳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賢弼은 寶城君에 봉해지니 寶城吳氏의 시조로 分籍되었다.

그 후 賢弼의 셋째 아들 元이 고려 고종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참지정사 도원수가 되고 국훈으로 奉明大夫에 이르고 和順君에 봉해지니 和順吳氏의 발상이다.

그 후손 중에 오사충(吳思忠)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開國一等功臣이 되었고 또한 방원을 도와 임금이 되도록 하기도 하였다.


和順吳氏의 시조 吳元의 19세손인 吳太古가 안덕면 화순리에 입도하여 대정 지역에 살게 된 것이 和順吳氏濟州入島祖가 된다.

吳元의 선친인 吳德立은 승정원 부승지, 松禾縣監을 지냈는데 인조반정 후 세상이 어지러워졌을 때 南以恭·朴承宗 등 權臣의 미움을 받아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몇 해 후 유배가 풀려 고향인 나주로 돌아간 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 아들 太古가 인조17년(1639) 勤力副尉의 관직을 가지고 선친의 유배지였던 대정을 다시 찾은 것이다. 문중에서는 선친의 遺恨을 달래기 위한 효심의 발로라고 여기고 있다.


吳太古는 대정골에 정착하여 連境30리 내의 좋은 토지를 생활의 터전으로 마련하였으며 조천당 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다.

장례 때에는 무려 100일 동안이나 장지 사방에 촛불을 밝혔다고 하여 이곳을 촛대왓(燭竹田)이라 부른다. 묘는 將軍大坐形이라고 한다.


오찰방은 이름이 榮冠이며 太古의 증손자이다. 숙종20년(1694) 대정읍 인성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致勇, 호는 月坡이다.

유년시절에는 '飛龍羽兒', 청년기에는 '壯士桃板', 장년기에는 '叛盜平征', 노년기에는 '貧者求活' 등의 전설을 남겼다.

전하는 말로는 어릴 때부터 雄建하고 천성이 준수하며 용맹이 나는 듯하였고 힘이 장사여서 씨름판에 나서면 이길 장사가 없었는데 누님만은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어모장군, 선전관, 의금부도사, 내어장군, 碧沙察訪을 지냈다고 한다. 구월산에 騎牛賊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니 군사를 거느리고 가던 중 黃耉神人을 만나 계책을 물어 山谷에서 추장과 잔당을 잡아 개선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서귀포문화 2008년 창간호 오재수씨의 글「吳氏의 發源」참조)


넓은 산담 안에 2기의 묘가 있으며 오찰방의 묘에는 '禦侮將軍吳公榮冠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 少年時節부터 天資가 英偉하고 性稟이 快活하야 文武에 執中하고 孫吳兵法을 배우며 弓馬를 練磨함에 얼마나 超人的인지 山方山을 뛰어넘고함이 나르는 새와 같으셨다.

공은 항상 닦은 實力으로 英祖卽位에 反賊麟佐輩가 忠淸慶尙平安 3도에서 兵을 일으키자 公이 이를 平定하니 守門將이 되고 義禁莩事를 兼職中 또 九月山에 騎牛賊이 漢陽에 侵入하여 궁궐내에까지 소란을 피우니 공이 군졸을 인솔하여 구월산까지 추격하여 賊을 一網打盡하니 임금께서 그 공로를 높이 칭찬하시고 宣傳官活人署別提와 內贍寺主簿 및 碧沙道察訪禦侮將軍을 임명하셨고 英廟에 贈兵曹參議를 하셨다.

… 1755년 12월 卒'이라고 되어 있다. 산담 왼쪽 앞 구석에는 옛비석과 깨진 동자석이 남아 있다.

오찰방에 대해서는 제주도 전역에 전설로 퍼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찰방은 조선 시대 현종 때 대정고을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이름은 영관이었다. 오찰방의 아버지는 부인이 임신을 하자 튼튼한 자식을 낳으라고 소 열두 마리를 잡아서 먹였다. 그런데 낳고 보니 딸이었다.


다음에 또 부인이 임신을 하자 오찰방의 아버지는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까 봐 소 아홉 마리를 잡아서 먹였다. 그런데 낳고 보니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열두 마리를 먹일 것을 잘못했다고 약간 서운해 했다. 이 아이가 후에 찰방이 된다.


오찰방은 어릴 때부터 힘이 셌다. 대정고을에서 씨름판이 열렸다 하면 오찰방이 독판을 쳤다. 제주 삼읍(三邑)에서 장사들이 모여들어도 오찰방을 당해 낼 사람이 없었다.

“나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고 오찰방이 잘난 체를 하자 그 누나가, “그러면 이번 한림에서 다시 씨름판이 열리는데, 거기 나가 보면 너를 이길 장사가 올 것이다.” 하고 말했다. 오찰방은 픽 웃어 넘겼다.


마침내 한림 씨름판이 열렸는데, 몇 사람이 달려들어도 오찰방을 이기는 장사가 없었다. 오찰방은 득의양양하여 군중을 휘둘러보았다.

그때 조금 연약해 보이는 사내가 구경꾼들 속에서 나왔다. 사내는 의외로 힘이 세었다. 오찰방은 있는 힘을 다해 내둘러 보았으나 끝내 지고 말았다.


생전 처음 씨름에서 진 오찰방은 집에 와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억울하다고 누나에게 야단이었다. 그런데 그 연약한 듯한 사내는 사실 오찰방의 누나였다. 오찰방이 너무 안하무인으로 힘자랑을 하는 것 같아 기를 꺾어 주려고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섰던 것이다.


누나는 오찰방이 며칠째 분을 참지 못하고 끙끙 앓자, 오찰방의 진신(가죽으로 짚신처럼 엮어 놓은 신)을 집의 서까래 틈에다 끼워 놓았다.

오찰방은 진신이 서까래에 끼워져 있으니까 빼내려고 잡아 당겼는데, 아무리 힘을 써봐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누나가 와서는, “뭘 그렇게 힘을 쓰느냐?” 하면서 쓱 하고 진신을 빼내 준다. 그제야 오찰방은 씨름판의 장사가 누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오찰방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장난이 심하여 아버지가 혼을 내주려고 하는데 나막신을 신은 채 도망을 친다.

‘요놈, 이번엔 가만 두지 않겠다.’ 하고 아버지는 짚신을 신고 뒤를 쫓았다. 나막신을 신은 놈이 도망을 가면 얼마나 갈까 싶었는데, 바굼지오름으로 부리나케 뛰어 올라간다.


슬슬 화가 난 아버지는 '이놈을 꼭 붙잡아 행실을 가르쳐야지.‘ 하고 봉우리 위로 쫓아 올라갔다. 드디어 오찰방이 상봉의 칼바위까지 도망가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칼바위‘라는 곳은 정말 칼로 끊은 듯이 천인절벽인 곳이다.


‘옳다, 이젠 잡았구나.’ 하며 아버지가 가까이 가자 오찰방이 그 천인절벽에서 덜썩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아들이 죽었으니 이를 어쩌나!’ 하고 아버지가 망연자실, 허겁지겁 오름에서 내려오는데, 나막신 신은 아들놈이 오름 서쪽으로 건들건들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가서 시체나 거두려던 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높은 절벽에서 나막신을 신은 채 뛰어내린 아들이 상처 하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래서 아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옷을 벗겨 보았는데, 양쪽 겨드랑이에 거짓말같이 날개가 돋아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역적으로 몰릴 것이 뻔하다. 아버지는 오찰방의 날개를 불로 지져 없애고 아들을 달래었다.


오찰방은 자라서 벼슬을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갔다. 이때 마침 서울에서는 호조판서의 호적 궤에 자꾸 도둑이 들어 중요한 문서와 돈을 가져가서, 이 도둑을 잡는 자에게 천금 상에 만호(萬戶)을 봉하겠다고 거리거리마다 방이 나붙어 있었다. 오찰방은 '아무련들 내 힘을 가지고 요 도둑 하나 못 잡으랴.' 하고 지원하여 나섰다.


도둑은 이만저만한 장사가 아닌데다 무술이 뛰어나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오찰방은 좋은 말을 빌려 타고 도둑을 찾아 나섰다. 며칠 후 도둑을 찾아낸 오찰방은 말에 채찍을 놓아 도둑을 쫓았다. 도둑은 소를 타고 있었는데, 소의 두 뿔에다 시퍼런 칼을 묶고, 또 두 손에 시퍼런 칼을 쥐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눈이라도 깜짝할 오찰방이 아니다.


도둑은 이제까지지 자기를 잡으려는 놈과 몇 번 싸웠지만, 이렇게 용감히 덤비는 놈은 처음이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구나 하고 천기를 짚어 보니, 제주에 사는 오 아무개한테 죽게 되어 있었다.


혹시 요놈이 그놈이 아닌가 싶어서, “네가 제주 사는 오 아무개냐?” 하고 물었다. “허, 네가 어찌 내 이름을 아느냐?” 하고 오찰방이 놀라자, “아차, 내 목숨은 그만이로구나, 네 손에 죽으라고 되어 있으니 할 수 없다. 모가지를 떼어가라." 하며, 모가지를 순순히 내놓았다.


오찰방은 도둑의 목을 베어 말꼬리에 달고 한양으로 들어갔다. 한양에서는 제주놈이 무서운 도둑을 잡아 온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런데 오찰방이 말을 타고 궁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이놈, 제주놈이 말을 탄 채 어딜 들어오려고 하느냐!” 하는 호통 소리가 떨어졌다. 오찰방은 역시 좁은 데에서 난 사람이다. 마음이 졸해서 얼른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오찰방은 의기양양하여 임금께 도둑의 목을 바쳤다. 그런데 임금이 상을 주기는커녕 “이놈을 얼른 옥에 가두라.”고 명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무서운 도둑을 잡는 것을 보니, 그대로 두었다가는 역모를 꾸밀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임금이 직접 오찰방을 문초했는데, 제주놈에다가 궁중에 들어올 때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온 것을 알고는, "서울놈 같으면 사형을 시킬 것인데, 제주놈이니 큰일은 못할 것이로다. 너에게 자그마한 벼슬이나 줄 것이니, 어서 나가서 일이나 잘해라." 하고, 찰방 벼슬을 내주고 제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오찰방」은 ‘아기장수 설화’류의 일화에 힘센 장사 이야기가 결합된 민담이다. 제주의 역사적인 인물로 난을 일으켰던 이재수와 방성칠과 관련한 이야기들의 주요 모티프는 힘센 장사 이야기이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죽음을 맞는 데 비해 「오찰방」의 오찰방이 찰방의 벼슬이라도 하게 된 것은 육지와 달리 날개를 떼어내도 죽지 않는다는 제주 특유의 ‘아기장수 설화’ 모티프 때문일 것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허남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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