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삼별초 물자운반용 포구..외도2동 조공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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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삼별초 물자운반용 포구..외도2동 조공포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4.17 0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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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포(朝貢浦)라 불렀는데, 훗날 제주사람들이 '조공(朝貢)'이란 말을 '도근(都近)'으로 바꾸어 도근포로 변했다

외도2동 조공포터
 

위치 ; 외도2동 외도천 입구 서쪽 포구
유형 ; 포구
시대 ; 고려

 

 

1271년(원종 12)에 제주도에 들어와 항파두리 토성을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가 물자 운반용으로 사용했던 포구이다.

‘도근포’, 혹은 ‘외도포’라고도 불리는 제주시 외도동 해안 지대의 포구이다. 1271년 전라남도 진도 용장산성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이후 제주도에 들어왔던 김통정 장군 통솔의 삼별초군이 물자 운반용 포구로서 이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별초군이 포구로부터 제주시 애월읍 광령3리를 거쳐 항파두리 토성까지 이어지는 운반로를 닦았다고 한다. 이 운반로는 지금은 지역 주민들이 농로로 이용하고 있다.


한편, 병사들과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삼별초 지휘부에게는 탐라를 수비하는 것 못지않은 중요한 과제였다. 결국 삼별초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해안 일대에 관아와 고려 관군의 기지를 기습하였고, 또 관아에 보관된 식량이나, 세공선이 운반하는 식량을 탈취하여 제주도로 운반하였다.

고려 원종13년(1272) 고려 이유비가 원에 보낸 글을 보면 당시 삼별초가 고려조정을 얼마나 공포에 떨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탐라의 역적들이 금년 3월과 4월에 회령․함포․해남 3현의 포구를 침공하였고, 5월에는 회령․ 탐진․ 2현을 공격하였습니다. 무릇 전후하여 약탈당한 선박이 25척, 양곡 3천 2백여 석, 피살자 12명, 납치자가 24명입니다. 노효제라는 자가 역적에 붙었다가, 14일 만에 도망 와서 말하는데, 역적은 390명이 11척에 나누어 타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공미 운반선박을 빼앗고자 연안 포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장차 전라도의 전선 만드는 곳을 침공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렇게 탈취한 전리품들은 도근천 하류에 있는 도근포를 통해 항바드리성으로 운송되었다. 삼별초는 이 포구를 조공포(朝貢浦)라 불렀는데, 훗날 제주사람들이 '조공(朝貢)'이란 말을 '도근(都近)'으로 바꾸어 불러 포구의 이름이 도근포로 변했다고 한다.


이 포구는 고려시대 후기에는 물자가 드나드는 만큼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 포구와 관련된 '도근천노래'라고 하는 민요가 고려말의 이제현이 지은 <소악부>에 한시로 번역돼 실리어 전해지고 있다.


都近川謠(도근천요)
都近川頹制水坊 水精寺裏亦滄浪 (도근천퇴제수방 수정사리역창랑)
上房此夜藏仙子 社主還爲黃瑁郞 (상방차야장선자 사주환위황모랑)


"도근천의 둑이 허물어져서 수정사 안에도 물이 출렁이는구나, 상방에는 이 밤에 아리따운 여성을 숨겨두고 주지승이 오히려 뱃사공이 되었네."


또는 “도근천 물에 둑이 터져서 수정사도 왼통 물바다가 되었네. / 이날 밤 윗방에 예쁜 처자 감춰두고 주지 꼴 보게, 뱃사공이 되어 들어가누나.”


이제현이 한시 11수를 남기면서 대부분 시에 대해서는 그 출처나 제목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도근천요에 대해서만은 제목과 더불어 제주도민요를 직접 옮긴 것이라며, 시의 해설까지 남겼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어 당시의 사회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근 높은 벼슬을 하는 관리가 연회 자리에서 늙은 기생 하나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승려들과는 어울리면서 사대부가 부르면 오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고 했다. 기녀가 대답하기를 '요즘 사대부들은 돈 많은 상인들의 딸을 취하여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노비를 취하여 첩을 삼는데, 우리가 중과 속인을 구별하여 대한다면 어찌 입에 풀칠인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부끄러워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그 당시 사회는 부패한 관리와 원나라의 약탈로 인해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료층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생계를 를 유지해가던 기녀들까지도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말기의 참담했던 현실을 짧은 노래 한 편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 선조10년(1679)에는 어사 이증(李增)이 제주안핵겸순무어사로 임명되어 왔다. 제주에 온 이증은 이듬해부터 제주섬 일대의 방호시설을 점검하였다. 그가 이곳 도근천을 찾은 것은 1680년 음력 2월 26일의 일이다.


“고내포의 남쪽 봉수, 남두포의 동쪽 봉수, 엄장포, 수산봉수, 귀일포, 조부포의 동쪽 연대를 지나 조공천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교수 정유설, 목사군관 이수원이 나를 만났다. 이 포구 역시 이선(李選)이 순무할 때에 방호소를 장차 설치하기로 건의했던 곳이다.

형세를 두로 살펴보니 포구 및 배를 정박하는 곳이 비록 애월, 조천 두 포구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다음이 될 만하다. 그러나 갯가 백성의 집들이 즐비하여 거주민이 비단 백성을 시키고 군중을 동원함을 꺼릴 뿐만 아니라 실로 집까지 헐려 옮기게 되니 억울하다고 외치며 길을 막아 호소를 드리어 아주 시끄러웠다.”


“내가 보건대 조공천의 바위 밑의 연못은 깊고 푸르러 작은 배도 수용할 수 있다. 옛날에는 수달 같은 것이 있었는데 달라져 버렸다. 고장사람에게 물었더니 괴물이라면서 지금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매해 7월에는 여기에 초피를 담가 은어를 잡을 수 있다. 포작배(浦作輩)는 깊은 바닥에 잠수해 들어가도 아무것도 거리끼는 게 없다고 했다.”


이선이 어사에 임명되어 제주를 다녀단 것은 1675년의 일이다. 이후에 이 곳에 방호소가 들어서는 과정에 주민들은 가옥철거와 강제이주를 강요당하면서 적잖이 고통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도근천방호소에는 병졸 144명이 주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일우
http://blog.daum.net/da-woum/
http://cafe.daum.net/loveletter23/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위 사진(월대 소나무)을 조공포터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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