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설촌 100년, 주민 100명..남원2리 버너리굴마을터(잃어버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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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설촌 100년, 주민 100명..남원2리 버너리굴마을터(잃어버린마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4.20 0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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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지세가 반달 모양 같다고 해서 반월동(半月洞)으로도 불렸다

남원2리 버너리굴마을터(잃어버린마을)
 

위치 ; 남원읍 남원리 1691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마을 터

 

 


설촌 100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이 마을은 정성필, 정길순, 현덕우, 현만옥, 현남두 등 20여 호에 약 100명의 주민들이 살았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지서의 명령에 따라 1948년 11월 남원상동(2리) 주민들과 함께 남원1리로 소개당한 주민들은 지서 앞 바닷가에 함바집을 짓고 수년간 집단생활을 했다.

이후 '존다리못', '서옥기' 등 다른 마을은 재건했으나 '버너리굴'은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제주4·3유적Ⅱ 263쪽)


올레나 대나무숲 등이 조금 보이지만 대부분의 집터는 감귤원으로 바뀌어 옛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2003년 제주도가 표석을 세웠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여기는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남제주군 남원읍 남원2리 버너리굴 마을 터이다. 마을의 지세가 반달 모양 같다고 해서 반월동(半月洞)으로도 불렸다. 1백여년전 설촌된 이후 현씨 고씨 김씨 정씨 등 23호에 1백여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짓고 우마를 기르며 살던 비교적 부유한 중산간 마을이었다.


그러나 4.3사건의 회오리바람은 이 마을이라고 비껴가지 않았으니, 주민들은 1948년 11월경 남원1리로 스스로 소개하여 왔으나 텅빈 마을은 그달 28일 무장대에 의해 전소되었고 이 와중에 소개된 마을에서 주민 4명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소개지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재건명령에 따라 현재의 리사무소 근처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이후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아 지금은 감귤 농장으로 변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올래와 대문의 흔적, 그리고 훌쩍 자란 소나무와 동백나무들이 여기에도 사람들이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는 이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염원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4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위원장 제주도지사》


이곳은 특이하게 담을 이중으로 쌓은 곳이 있는데 이 밭 주인 할머니는 안쪽의 담이 4.3당시의 원래의 담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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