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조수2리 애국지사이창휘묘(이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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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조수2리 애국지사이창휘묘(이묘)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0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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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변론했던 이인(李仁, 초대 법무부장관)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변호사 등 3인방 중 1인..

조수2리 애국지사이창휘묘(이묘)터

 

抗日民權辯護士李昌輝先生墓
분류 ; 묘
위치 ; 한경면 조수리 3575번지. 고산2리 전답동 창고에서 동쪽으로 약 5~600m 농로 따라가서 오른쪽으로 난 비포장도로로 50m 지점 '全州李氏海安君派十三孫 嘉善大夫桂迪公後孫家族墓苑' 안에 있었다.
시대 ; 일제강점기
성격 ; 변호사/항일운동가
생몰년 ; 1897년(고종34) ~ 1934년
본관 ; 전주
대표 경력 ; 조선농민사 이사, 조선변호사협회장, 제주출신유학생후원회장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7회)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법률 공부를 한 뒤 1921년 8월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24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0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독립운동가를 위한 변론으로써 일제에 맞섰다.


1925년 5월 12일자 동아일보에도 제주신인사건에서 경성변호사 리창휘(李昌輝)씨가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하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5년 10월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농민사가 결성될 때 김준연(金俊淵)·최두선(崔斗善)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제주출신유학생후원회 회장, 보성전문학교 교우회장,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민중 계몽을 위해 전국 순회하면서 농민에게 필요한 법률상식 강연도 하였다.

고향에도 애정을 기울여 1929년에는 고산포를 정기여객선 기항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성사시켰으며, 1931년에는 고산우체국 설립 과정에도 힘을 써서 마을에서 우체국 앞에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었다. 공덕비는 수월봉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필자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변호사 시험 합격 후 사망(1934년) 직전까지 그가 법조계에 투신한 목적대로 전국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을 위한 무료변론으로 일관했다.

당시 "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변론했던 인물로는 선생 외에 이인(李仁, 초대 법무부장관)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변호사 등이 있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변호사로서 이창휘 선생이 언제나 앞장섰고 두 분 또한 함께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3인방이었다. 이들 셋은 항일독립투쟁사에 남을 큼직한 민족해방운동 사건에 빠짐없이 변론을 맡았다.


이창휘는 특히 항일운동가와 사상가, 민중운동에 헌신하던 인사들의 변론에 힘썼다. 1926년 6.10만세운동 주동자 10명에 대한 공판에서 이들 3인의 무료변론은 당대에 유명했으며 1928년 6월 변호사 10명이 참여한 경상남도 청년연맹 사건 재판에 자청하여 변론에 나섰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사건 주동자 박형기 등 49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 공판에서도 '범죄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전원무죄를 주장했다.

변론에 앞서 조선일보(1930. 2. 6.)는 "경성 법조계에서 명성이 높은 이창휘 이인 김병로 변호사가 자진 변론키 위해 광주에 출장간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고 있어 이변호사의 당시 명성을 짐작케 한다.

이 사건에서 선생은 "피고의 자유진술을 반대하고 일사천리로 심리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재판장에 수차례 항의, 재판의 불공정성을 통박했다.


1929년 영국의 식민지정책을 비난했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돼 일제(日帝)에 인도됐던 몽양 여운형 사건과 관련, 이창휘 이인 김병로 허헌 등 4인이 무료변론을 자진하기도 했다.

1930년 6월 조선청년총연맹함북청년연맹 사건과 관련 16인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게 되자 검찰의 가혹행위 등을 거론 재판장으로부터 주의를 받는 등 동포의 인권 문제를 강력하게 옹호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도산 안창호 사건·간도사건·공명단(共鳴團) 사건·조선공산당일본지부당원 사건·경남청년연맹 사건 등의 공판에서 무료 변호하는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대사건에서 무죄를 주장, 주권없는 국민의 권리 회복에 정열을 쏟았다.

이와 함께 선생은 조선 농민사 이사로 활동하면서 전국순회강연·초청강연에 나서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농민야학·공생조합운동·공동경작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1929년 4월 공명단(共鳴團)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서울 망우동에서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한 사건의 재판에서도 이인·허헌과 함께 민족적 입장에서 변호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운동가 김문준(金文準)이 연루된 사건의 재판에서 변론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이창휘는 김병로·허헌과 함께 ‘민권변호 삼총사’라고 불렸으며, 조선공산당 사건과 간도공산당 사건 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변호를 많이 맡아 사상 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연설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그는 1934년 가을 농촌계몽을 위한 순회강연 도중 9월 10일 함북 웅기읍의 한 여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38살의 나이였다. 건강하던 선생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이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의 정보기관에서 암살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장 목격자나 물증이 없어 영원히 의문 속에 묻혀 있다.


당시 동아일보(1934년 9월 12일자)는 《李昌輝氏 客地서 長逝》제하에 〈제1차 공산당 사건 이후로 사상관련 필화사건은 물론 형사사건피고변론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창휘(李昌輝)변호사는 작년에 웅기(雄基)로 옮겼던 바 신병으로 드디어 치료가 효력을 보지 못하고 10일에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한다.

씨는 제주(濟州) 출생으로 당지 보통학교를 마치고 간이농업학교 2년제를 마치고 관청에 취직되어 있는 중에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고 보성전문학교법과에 입학하야 대정13년에 졸업하면서 동년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씨는 고학성공한이만큼 앞으로 기대가 많았던 바 섭섭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다.

사진은 고이창휘씨〉라는 기사를 썼다. 여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없는 것은 일제의 검열에서 삭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와 같은 선생의 업적은 1995년까지 묻혀 있었는데 고산리 주민 고원준(高元準, 71)씨의 꾸준한 숨은 노력 끝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제민일보 4327. 3. 1, 제주신문 4328. 8. 16, 한라일보, 4328. 8. 18.)


고려대학교 교우회보(제9회)의 「모교를 빛낸 교우들」란에 이창휘의 생애와 사상을 밝힌 글 끝에 '만약 그가 가인 김병로나 애산 이인처럼 조국광복을 보았더라면 법조인으로서 일각을 차지했을 텐데 이렇듯 반세기 동안 잊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1995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愛國志士李昌輝之墓'라고 새겨진 비석의 비문은 '公의 諱는 昌輝 本은 全州李氏 中宗大王二男 靖僖公海安君十六世孫이시며 曾祖諱는 桂迪 祖諱는 平元 先考 諱는 行旭 先비는 廬山宋氏殷世二女奉온 公은 一八九九年五月二十日生 一九三四年九月九日逝去 享年三十六歲 配는 金海金氏龍彬의 女老梅 長男崙植長女英子次男珖植 長孫은 芳憲 女서는 梁인謙 外孫은 根豪 造水里 四一一九番地 全州李氏海安君派十三孫桂迪公塋域內 李昌輝 志士는 一八九九年五月二十七日 구우면 고산리에서 父李行旭 母宋奉온의 七男二女中 二男으로 태어나 一九一七年 濟州農業學校를 卒業하여 한 때 官廳에도 근무하였으며 보통문관 試驗에도 合格하였으나 여명에 높은 뜻을 펼치고자 上京하여 一九二四年普成專門學校를 卒業 그 해 朝鮮辯護士試驗에 合格하므로써 그 뜻을 펴기 시작 一九二五年十月 朝鮮農民社 理事로 선출되므로 하여 農民들의 권익보호에 一翼을 담당하여왔으며 一九二六年度 민족독립운동사로 기록되는 六·十萬歲事件을 비롯 一九二七年도 朝鮮共産黨사건 新幹會記者被訴사건 一九二六年도 경남청년연맹사건 一九二九年도 呂運亨사건 一九三○年초 光州학생사건 함북청년연매사건 間島사건 등을 당대의 朝鮮辯護士를 대표하는 李仁 初代檢察總長 許憲 辯護士와 같이 祖國독립운동으로 투옥당하는 人士들을 무료변론으로 구조활동을 하여왔으며 一九三二年 六·七月 東亞日報社가 주최하는 특별대강연 인생과 범죄에 대한 演士로서 辯護士로서 또한 理事로서 그 품은 뜻을 채 펼치기도 전 함경북도 雄基로 옮긴 다음해인 一九三四年九月十日 三十六歲에 身病으로 他界하셨다. 정부에서는 志士의 공훈을 기리어 一九九五年八月十五日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西紀一九九六年四月日 北濟州郡守 謹竪'라고 새겨져 있다.


따님 이영자씨가 생존해 있으며(한라일보 150616 인터뷰 기사), 손자 이방헌씨가 2010년 10월 12일 묘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겼다.
《작성090303, 보완 150616, 17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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