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사람의 힘으로 하는 모든 수단 총동원..아라1동 516도로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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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사람의 힘으로 하는 모든 수단 총동원..아라1동 516도로표석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1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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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관 도지사는 이 도로가 대한민국 최초의 산악도로이자 관광개발도로라고 규정했다.

아라1동 516도로표석
 

漢拏山橫斷道路標石
위치 ; 제주시 아라1동 415-1번지. 산천단 북쪽 춘강장애인복지회관 서쪽
유형 ; 표석
시대 ; 대한민국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영어의미역 Construction of the Hallasan Cross-cutting Road

 


제주의 산악 도로는 예로부터 주민의 방목과 산림 벌채 등을 위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일제(日帝)는 1932년에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한라산횡단도로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 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한라산 동쪽 횡단도로로서 당초에는 1932년 국유림 횡단도로 공사를 통해 임도로 개설되었다. 그 뒤 1935년 일본군의 군사 목적으로 일부 도로가 정비 및 관리되어 오다 1938년 2월 1일 전라남도 고시 제216호 지방도로 지정되었다.


한라산을 횡단해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에 해당하는 곳의 땅을 거의 무상으로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상으로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면장의 지휘 하에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도로의 개설로 도내 교통의 원활함을 가져왔겠지만 실은 일제의 자원 침탈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 일본군이 건설한 산악도로는 해발 900m 한라산 국유림 지대인 어승생수원과 어승생봉을 중심으로 한라산록을 띠를 두르듯이 만들어 놓았다.


일본인들은 이 도로를 '하치마키'(일본어로 머리띠의 의미)도로라고 하였는데, 서쪽으로는 지금의 한밝교 영실을 거쳐 노루봉 뒤 영실 분기점인 법정악에 이어졌고, 동쪽으로는 수악교 상류와 논고악, 성판악에서 수장악-관음사-천왕사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군이 대미 결전의 전초 기지로서 7만 대군을 한라산록에 주둔시켰는데, 이들 일본군은 군사 행동을 위해 물이 있는 곳을 골라 도로를 개설하였다.


이렇게 국도 11호선은 일제강점기 때 이용되다 중단되었지만 제주시와 서귀포 간을 신속히 연결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1차 복구공사는 1958년 6월 6일에 완료되었다. 총공사비 1,500만환으로 제주시 삼의악교로부터 수장원 동북쪽까지 1차로 7,440m길이를 착공하여 7개월 만이었다.


제주시를 기점으로 한라산 동쪽 산허리를 거쳐 서귀포까지 전장 45㎞의 횡단 복구공사는 예산 관계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중산간 도로인 제주시 삼의악교부터 서귀포읍 토평리까지 35㎞의 길이를 국고 보조로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평면 도로로 개척한 채 버려둔 것을 23년 만에 복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잡목이 우거진 길을 너비 6.5m로 양쪽으로 1m 깊이의 도랑을 파고, 노면에는 4m 넓이로 돌 자갈을 깔아 놓았다.


동 공사구간 내에는 세월(洗越) 2개소, 암거(暗渠) 2개소, 도수로(導水路) 6개소를 신설하였다. 공사는 제주시 국화기업사가 청부하여 작업 일수는 186일이었으며, 연간 인부는 19,300명, 1대의 덤프트럭이 80일간 외도동, 오라동, 애월읍 하귀리 등지에서 돌 자갈과 모래를 운반하였다.


2차 공사도 국화기업사가 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횡단도로 삼의악교 가기 전 2㎞와 수장원 남쪽 4.37㎞의 복구공사를 국화기업이 1,897만환에 낙찰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총 복구공사 예정거리 30㎞ 중 절반에 가까운 거리가 복구되었다.


본격적인 횡단도로(5·16도로)의 포장은 1962년 3월 23일에 기공하여 1969년 10월 1일에 개통식을 가지면서 제주시 일도1동의 중앙사거리에서 서귀포시청 사이에 있는 41.1㎞의 도로가 완성되었다.


1963년 2월 6일 국도로 지정되면서 5·16도로로 명명하고 박정희 대통령 휘호로 2m의 자연석에 음각하여 산천단 북쪽 도로변에 세우고, 당시 도로 건설을 추진한 김영관 도지사의 공적비는 750m 성판악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 뒤 도로의 확장 공사가 추진되어 1981년에 완공할 때까지 총 공사비는 53억2300만원이 투입되었다.


이 도로의 포장 완공으로 제주~서귀포 간 5시간을 1시간여로 단축하고 원시림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도로로서 절찬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오리오름 옆에 사무소를 설치하여 이 도로를 지나는 차량에 대해 통행요금을 받았는데, 1972년 4월 18일부터 통행요금을 보면 대형버스 400원, 중형버스 250원, 소형승용차 200원, 트럭 150원, 소형화물차 100원이었고, 징수 요금은 3억7728만7000원 이었다. 1982년 12월 31일까지 받고 통행료는 폐지되었다. 통행료를 폐지한 이유는 이용 차량들이 불편하고 또 도로가 1963년에 국도로 지정된 상태에서 도가 요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김영관 도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시 방면은 삼부토건, 성판악에서 영주교 간 도로개설 및 포장공사는 동방공영이 공사를 맡았고 겨울철인데도 김영관 도지사가 공정을 맞추려고 준공날짜를 어길 경우 업체를 바꾸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심하게 독촉했다고 한다.


공사에 많은 장비가 투입되긴 했지만 공사물량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란 형편이었고, ‘침투식 마카담’공법으로 추진된 포장공사는 곡괭이, 삽, 바지게 등 사람의 힘으로 해야 하는 모든 수단이 총동원되었다.


육지에서는 한라산을 통과하는 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은 한라산에 터널을 뚫는 것이냐고 묻기도 할 정도로 호기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정부의 최고위원과 장관, 고위관료들이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공사 현장을 들리는 게 관행처럼 되었다. 김영관 도지사는 이 도로가 대한민국 최초의 산악도로이자 관광개발도로라고 규정했다.


이 공사 시기인 1962년 4월 12일 제주도식물학조사단(단장 박만규)에 의해 왕벚나무가 발견되었으며 원산지로 판명되었다. 도로변의 잡목(원시림)은 경제성이 없다고 하여 1963년 7월부터 벌채에 착수했고 표고자목으로 쓰기 위한 나무를 벌채하는 것도 허가했으며, 9월부터는 삼나무로 바꾸어 심었다.(제주일보 110819)


이 비석은 삼각기둥에 가까운 모양의 자연석에 '五一六道路'라고 같은 글자를 두 면에 새겼고 뒷면에는 '題字朴正熙大統領閣下 西紀一九六七年三月日'이라는 작은 글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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