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비석 모조품 항일기념관 전시.. 교래리 애국지사백응선묘
상태바
[향토문화]비석 모조품 항일기념관 전시.. 교래리 애국지사백응선묘
  • 고현준
  • 승인 2020.05.18 15: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문에는 일제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일본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를 표시하였다.

교래리 애국지사백응선묘

 

위치 ; 교래리 산137-1번지. 속칭 '조린납'(助仁納) 지경.
생몰년 ; 고종33년(1896)~1920년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와 묘비


비석 모조품 위치 ; 조천읍 조천리 1156 항일기념관
비문 ;〈앞〉故白膺善君之墓 〈뒤〉君諱膺善水原白氏燦奎子也丙申三月七日生庚申三月二十八日卒附葬于橋來境助仁納 考墓右坤坐原有一女己未春君與同志十四人宣傳獨立被逮服役盡期出獄而未半年奄作不歸客嗚呼哀哉銘曰嗚呼白君天耶命耶同志十四方其八獄也捨身輕若鴻毛及其出獄也誓心有如皎日嗚呼白君天耶命耶同志十四雖不與之同死徇從孰不爲之肝蝕腸裂嗚呼白君天耶命耶同志十四哭君 〈왼쪽〉靈而少一人慰君靈而銘短碣 檀君四千二百五十五年壬戌三月日 〈오른쪽〉金容燦 李文千 朴斗圭 金熙明 金章煥 金時殷 金慶熙 金弼遠 高載崙 金時範 金年培 黃鎭式 謹竪

 

 

 



백응선의 묘는 교래4거리 서쪽 돔베오름에서 서쪽 400m 정도 지점에 있는 음식점 건물 서쪽으로 돌아 남쪽 내창 건너가서 풀길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맨 왼쪽 길로, 숲길 따라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소나무 숲 지나 작은 내창을 왼쪽에 두고 따라가다 왼쪽으로 가면 길 오른쪽에 철탑을 지나쳐 '상잣'을 통과, 숲길을 걸어 소나무에 흰끈 묶여 있는 앞에 작은 내창 나타나면 내창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여기서부터는 나무에 묶인 빨간 끈을 따라가면 된다. 찻길에서부터 약 30분 정도 걸었을 때 내창 오른쪽에 소나무 있는 동산으로 들어서면 주변 나무에 빨간 끈을 많이 묶어 놓은 것이 보이는 곳에 있다.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에서 위치 정보를 보면 위도 33-24-58-559999…, 경도 126-38-59-369999…로 나온다.


15m×12m, 폭 1.5m, 높이 1m 정도 되는 산담 안에 부친의 묘와 나란히 있다. 묘의 방향은 북동향이다.

본관은 수원. 호는 천야(天耶). 아버지는 백찬규(白燦奎), 부인은 안요원(安堯媛, 안세훈의 누님). 조천읍 조천리 2582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 만세 시위 운동에서 주동자 9명이 체포된 후, 백응선은 박두규(朴斗圭)·김필원(金弼遠) 등과 더불어 3월 22일 제2차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시위에서 박두규·김필원이 체포되었다. 3월 23일 제3차 시위가 조천 장터에서 시발되었고,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함덕리까지 행진하였다. 백응선은 김년배(金年培)·이문천(李文千) 등과 더불어 제3차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문천 등 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4차 시위는 3월 24일 조천장날이었는데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약 1,500명의 군중이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날 김년배 등 4명이 체포됨으로써 운동의 핵심 인물 14인이 모두 검거되어 만세운동은 일단락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1부에서 조선총독부 판사 죽미의마(竹尾義磨)·장야일랑(長野一郞)·전임래(田林來)에 의해 기각되었다. 6월형을 복역하고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20년 3월 28일 네 살 된 딸 하나를 남겨 두고 25살로 요절하였다.


1921년 백응선을 제외한 투옥 동지 13명은 동미회(同味會)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미밋동산[味毛峙]의 동지(同志)'라는 뜻이다. 이들은 감옥에서 새끼를 꼬아 얻은 약간의 노임을 공동관리하기로 하고 김희수로 하여금 재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동미회 회원 13명은 뜻을 모아 제1차 사업으로 백응선의 묘비 건립을 서둘렀다. 이에 1922년 김시범(金時範)이 한문으로 글을 짓고 교래(橋來) '조린납' 지경의 묘지에 '고백응선군지묘(故白膺善君之墓)'란 비를 세우고 측면에 동지 13명의 이름을 썼다.


비문은 “기미년 봄에 그대와 더불어 뜻을 같이 한 14명은 독립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복역을 마치고 그는 반년을 못 넘겨 불귀객의 되었도다. 오호라 슬프다! 마음속에 새겨 말하노라.

아아! 백군이여 천명이런가, 운명이런가! 동지 14명은 바야흐로 투옥되었지만 조국 독립을 위하여 내 몸 버리기를 홍모(鴻毛)와 같이 가볍게 여겼는데 급기야 일편 단심 맹세한 뜻은 출옥했을망정 옛날과 같도다.

동지들은 같이 죽지 못하고 타는 간장을 여미고 창자를 찢기지 못함이여. 아! 동지 13명은 군의 영전에 통곡하며 그대의 넋을 다소나마 위로하고자 짧은 돌에 글을 새기노라. 단군4255년 임술 3월 일”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응선 묘비의 비문에는 일제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일본 연호를 쓰지 않고 날짜에 단기를 표시하였다. 백응선 묘비는 산간 오지에 세워져 '宣傳獨立'이라는 낱말이 들어가 있음에도 일제 당국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에 광복 후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독립유공 건국포장(褒章)을 추서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홍순만)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후 광복회에서 새로운 비석을 세워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유족이 아직 받아들일 여건이 안 되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며, 비석 모조품이 항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작성 090411, 보완 160912》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