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파편이 비양봉 정상에 떨어져..협재리 일본군함침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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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파편이 비양봉 정상에 떨어져..협재리 일본군함침몰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2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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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함 제주해협 거쳐 상해로 가던 중 미군 잠수함 '데이란트'호에 의해 격침 당해

협재리 일본군함침몰지
 

위치 ; 한림읍 협재리와 비양도 사이 바다
유형 ; 전적지
시대 ; 일제강점기

 

 

1945년 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을 무렵 중국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본해군 1만톤급 수송선 '주삼마루(壽山丸)'와 호위함 '카이보깡(海防艦)31호', '카이노미마루(海能美丸)' 등이 제주해협을 거쳐 상해로 가던 중 비양도 남쪽에 정박하려던 차에 뒤쫓던 미군 잠수함 '데이란트'호에 의해 4월 14일 03:00경 격침당하였다.

함장은 '미군 잠수함이 따라오는 것을 알고 수심 낮은 데로 피신했지만 결국 비행기 폭격에 맞아서 침몰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협재리 주민들은 생존자들을 구조해 주었으며 생존자 160명을 제외한 504명이 전사했고 많은 시체가 협재해수욕장 모래밭으로 떠밀려왔다.

당시 조그만 돛단배로 수십명의 목숨을 구했던 옹포리 임홍모(任弘模)씨는 '온 동네가 폭발음으로 문짝이 다 날라갔고 곳곳에서 살려 달라는 비명이 울렸어요. 그러나 마침 썰물 때가 되어 배들이 모두 내려앉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내 배만 고기잡이 가려고 항 밖에 매어뒀기에 그 배로 생존자들을 구할 수 있었지요.'라고 회상했다.

이 때 전사한 병사들은 현재의 한림읍 충혼묘지 북쪽에 매장되어 있었으며 1970년경 유족들이 와서 유골을 반환해 갔다.


비양리 윤만선(2008년 74세)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폭격을 받은 일본 군함의 파편이 비양봉 정상에 떨어질 정도로 충격이 강했지. 죽은 일본군 시신들이 죽은 생선처럼 물 위에 떠다녔고…, 일본이 항복하기 전이라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어.

어민들이 배를 타고 다니면서 시신을 건져냈는데, 이 시신들을 땅을 파서 매장하거나 화장을 시켰어. 그런데 당시 일본 수송선에 타고 있던 시신들은 대부분 물 밖에 떠다녔는데, 군함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배 안에 갇힌 시신이 많았던 것 같아.

해방이 되었을 즈음에 옹포리에 사는 어느 어민이 좌초된 군함을 뜯어서 고물로 팔 마음을 품고 군함에 접근한 다음 배의 수밀문을 열었는데, 안에 갇혔던 시신들이 수압에 의해 한꺼번에 위로 쏟아져 나온 거야. 고철을 뜯으러 갔던 그 옹포리 주민은 흉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지 이듬해 병을 얻어서 죽었다고 해."


이 때의 생존자와 전사자 유족들은 '수산환회(壽山丸會)', '해십일회(海十一會)', '해능미회(海能美會)'란 모임을 만들어 몇 년마다 이곳을 찾아 위령제를 거행하고, 당시 협재리 주민들이 인류애를 발휘하여 생존자를 구제한 일을 사례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76년 위령단장 마시코겐지(益子建次)로부터 자료를 얻어 소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온 바다가 피로 물들었고 희생자들의 시체로 가득찼다. 그 때 파편이 비오듯하는 속에서도 우리를 구해 준 현지 주민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http://blog.naver.com/samboing)(제주의소리 2008년 8월 27일)

협재리 해수욕장 주차장 화단 앞에 '일본 해군 병사의 진혼처(鎭魂處)'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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