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명월리 가수 백난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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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명월리 가수 백난아 생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2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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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에는 남대문 서울역 앞에 백란(白蘭)다방을 차려 연예인의 집합소 역할을 하였다

명월리 가수백난아생가
 

위치 ; 한림읍 명월리 1750번지. 옛 명월초교 교문에서 남쪽으로 네 번째 집
생몰년 ; 1927년~1992년

 

 

가수 백난아는 명월리 오남보의 3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청진으로 이주하여 살았다.(백난아의 언니 '오귀아'는 '고용하'라는 제주 사람과 결혼하였다.

고용하는 서울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함남 청진으로 건너가 해산물 수출업을 하고 있을 때 백난아의 언니를 만났다. 광복 후에 월남하였고 6·25 후에 고향인 우도에서 살았다.)

'나그네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을 부른 가수 백년설(경북 성주 출신, 본명 이창민)의 양녀로 태평양레코드사에서 활약할 때 고향을 함경북도 청진이라고 쓰게 하여 함경도 출신인 것처럼 알려졌다.

'아리랑낭낭', '갈매기쌍쌍', '직녀성', '망향초' 등을 불러 유명해졌다. 한편 가수 금사향은 추억담(2008년 3월 23일)에서 "선배 백난아는 키가 매우 컸으며 얼굴이 예뻐 노래하는 몸짓은 그만이어서 참으로 당대의 멋쟁이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고창호 교장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대표곡인 '찔레꽃'은 1941년 작곡가 김교성 씨와 작사가 김영일 씨, 가수 백난아씨가 만주 공연에 갔다가 독립군들을 비밀리에 만나고 돌아와, 세 사람이 다시 명월대로 찾아와 독립군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주기 위해 만든 노래로 전해지고 있다.

찔레꽃, 세 동무, 달뜨는 저녁 등 아련한 고향의 정서가 담긴 가사 때문에 당시 독립군들이 틈만 나면 고향이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발표 당시에는 국내 반응이 미미했으나 1945년 해방 이후 특히 6.25 한국전쟁 후에는 민중의 노래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퍼지면서 애창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6년경 백난아는 가수 현인(玄仁)과 함께 제주도에 와서 한림문화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 조카인 고창호씨가 꽃다발을 드리기도 했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KBS TV '가요무대'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가 백난아의 '찔레꽃'이다. 지난해 말 갤럽조사결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요 100〉에서 53위를 차지했다.

한 마디로 '국민가요'라 할 수 있는 노래다.(제주의소리 2007년 4월 2일) 백난아는 서울에서 유명한 최고 가수로 인기를 누렸으며 경상도 출신 장씨(張氏)와 결혼, 네 자녀를 키우고 낭군은 후일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는 남대문 서울역 앞에 백란(白蘭)다방을 차려 연예인의 집합소 역할을 하였다.(제민일보 2008년 4월 6일)


2007년 4월 한림읍이 옛 명월초등학교 교문 앞에 '국민가수 백난아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 뒷면에는 백난아의 본명을 '오금숙'이라고 새겼는데 백난아의 언니 아들인 온평리 고창호 교장이 증언에 의하면 오금숙이 아니고 '오귀숙'(吳貴淑)이다.<김찬흡·제주도 문화재위원·논설위원>(제민일보 2008년 4월 6일)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앉아 백인 사진 /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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