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선정과 청렴함으로 후대에 이름 남겨.. 아라1동 이약동목사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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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선정과 청렴함으로 후대에 이름 남겨.. 아라1동 이약동목사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5.3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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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들의 고생 덜기 위해 제주시 아라동 소산오름 기슭에 한라산신제 제단 만들어

아라1동 이약동목사선정비
 

위치 ; 아라1동 375-12번지 산천단
유형 ; 비석(기념비)
시대 ; 조선(비석건립은 현대)
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

 

 


이약동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며 시호는 평정(平靖)으로, 현령(縣令) 덕손(德孫)의 아들이다.

1416년(태종 16년)에 김천 하로(양천동)에서 태어났으며, 강호 김숙자의 문하생으로 영남학파의 종주인 김종직(金宗直)·조위(曺偉) 등과 연령차이가 있었으나 교우를 맺었다. 26세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36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의 길에 올랐다.

1454년에 사헌부감찰·황간현감(38세)을 지내고 1458년에 지평·성균관직강(42세)을, 1459년에 청도군수(43세)를, 1464년에 선전관(48세)을, 1465년 사헌부집의(49세) 등을 역임했다.


이약동은 그 후 1470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도임(到任)하였는데, 제주목사 임기후에는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되어 떠나갔으며,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7년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 개성부유수(73세) 등을 제수 받고 1514년에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었다.

청백리란 의정부가 관리들 중 가장 청렴결백하다고 판단해서 선발한 자를 말한다.


제주목사 재직 당시 관하이속(官下吏屬)들의 부정(不正)을 단속하고 민폐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따르면 과거 한라산신제를 백록담에서 2월에 지냈기 때문에 얼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1470년(성종1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약동(55세)이 도민들의 고생을 덜기 위해 이곳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소산오름 기슭에 한라산신제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 정일(丁日)에는 이곳에서 산신제를 봉행하게 되어 주민 피해를 줄였다고 한다. 지금 산천단에 남아 있는 옛 비석 漢拏山神祭古선碑는 이약동 목사가 세웠던 것이다.(그것을 찾은 분은 1977년 홍정표였다.)


이렇듯 백성의 삶을 배려했던 그는 선정뿐만 아니라 청렴함으로도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


家貧無物得支分 내살림 가난하여 나눠 전할 것이 없고
惟有簞瓢老瓦盆 오직 있는 것은 쪽박과 낡은 질그릇 뿐
珠玉滿◎隨手散 황금이 가득한들 쓰기에 따라 욕이 되거늘(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
不如淸白付兒孫 차라리 청백으로 너희에게 전함만 못하랴.(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 - 이약동의 시


청렴을 자랑스러워하고 자식들에게까지 이를 가르치려 했던 이약동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다. 이 시 말고 다른 일화들에서도 그의 청렴함은 나타나지만 그의 청렴결백과 관련된 일화는 2건만이 소개되고 있다. 그게 모두 제주에서 그가 근무했던 때의 일이다.


그는 제주목사 직을 마치고 떠나면서 일체의 관청 물건을 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말을 타고 길을 떠나다가 문득, 자기 손에 들고 있는 채찍 역시 관청의 물건임을 깨닫고 성문 누각에 걸어 놓고 갔다는 것이다.

일체 관청 물건을 사유하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후 그 채찍이 낡고 훼손되자 사람들은 바위에 그 채찍 모양을 그려 놓았다고 한다. 후임 지방관들이 경계하라는 의미겠다. 그래서 그 바위는 ‘괘편암(卦鞭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공이 바다를 건널 때에 한바다에 이르니 배가 기우뚱거려 위험한지라 사공이 모두 실색(失色)하였으나 공은 의연한 모습으로 바로 앉았다.

한 비장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제주 사람들은 공의 청덕에 감동되어 선물로 한 포갑을 주면서 대야로 쓰도록 하였습니다. 아마 신명이 알아차린 게 아닌가 합니다"고 말하자 공이 바로 명하여 그것을 바다 가운데 던지게 하였다.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말하며 잘 건널 수 있었다.(역주증보탐라지)

그 바다를 '투갑연(投甲淵)'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 외에 제주도민의 진상품 수와 종류를 줄이려 노력했음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고 있다.


그런 선정을 베풀었기에 그가 한때 오현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엔 송인수에게 그 자리를 넘기게 되었다. 장인식 목사의 귤림서원 묘정비기(1848년경)에는 「제주성의 남쪽에 예전에 충암의 사당이 있었는데 평정공 이약동을 함께 배향하였다.

평정공은 이 고을의 목사였을 때 청백리로서 이름이 높았다. 1675년 지호 이선(李選)이 제주순무사로 왔다.

그 때 '충암 선생은 도학과 절의가 높은데 (평정공을) 같은 사당에 함께 모시는 것이 편치 않다'고 해서 따로 그 곁에 향사(鄕祠)를 짓고 평정공의 위패를 옮겨 모셨으니 이것이 이른 바 영혜사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때는 숙종 원년이다. 아마 서인 노론 정권이 극에 달할 때, 송시열의 권력이 막강할 때, 그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것 같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이약동의 위패를 충암 김정,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보다 위쪽 자리에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약동이 이들 3현보다 선대의 사람이니윗자리에 놓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도 그가 밀려난 것은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인 목사가‘영혜사’라는 사당을 창건하여 따로 모신 것은 1669년(현종 10년)의 일이다. 여기에 이약동과 이괴(李괴) 목사를 배향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전기 사림에서 나름의 위치를 가졌다고 한다. 강호 김숙자의 문하생이자 강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과 같이 수학하고, 그 밑으로 김굉필, 그리고 다시 대를 이어 조광조로 이어진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 조선전기 사림파의 맥락에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게 흥미롭다.


< 성종실록> 24년 6월 13일에는 이약동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어 그의 일대기가 나오는데 마지막에 사관이 붙인 말에서 그에 대한 다른 평가를 볼 수 있다.

“이약동은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마음을 굳게 가지며 청렴하고 성실한 것으로 소문났다. 여러번 지방관으로 나가 성적이 좋았으나, 이조 참판이 되자 마침 판서가 오랫동안 다른 곳에 나가 있었으므로 인사행정에 대한 권한을 도맡아 가지고 있던 관계로 청탁을 받고 사람을 추천한 일이 많았다.” 그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http://blog.daum.net/sonata1266/)


1989년에는 제주지방의 문화예술인들과 이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이씨문중회(碧珍李氏門中會)가 공동으로「목사이약동선생한라산신단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을 새로 건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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