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주민과 대판 거주 청년들 합심.. 상효동(영천동) 돈내코수원지(용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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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주민과 대판 거주 청년들 합심.. 상효동(영천동) 돈내코수원지(용천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6.10 0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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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철 썩어가는 물을 내무과의 코 끝에 들이밀며 "이런 물을 먹어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상효동(영천동) 돈내코수원지(용천수)

 

위치 ; 상효동 1463번지 일대. 돈내코 원앙폭포 아래 외 2곳
유형 ; 수리시설
시대 ; 일제강점기

상효동_돈내코제3취수조

 

상효동_돈내코원앙폭포 수도관

 

1926년 겨울 어느 날 오전 신효마을 안에서 엽총 소리가 들렸다. 당시 마을 구장의 아들이었던 김용찬씨는 웬 총소리인가 하여 수소문해 보니 '서가왓' 지경에서 비치(직박구리?) 한 마리를 잡고 서 있는 수염이 하얀 노인이 있었다.


김씨는 그 노인에게 "엽총 탄환 한 알이 10전인데 그것으로 1전도 안 되는 비치를 잡아 수지가 맞느냐?"고 묻고 또 "엽총 사냥을 할 때는 먼저 구장 집에 들러 허락을 받은 후 마을에서 벗어난 곳에서 사냥하는 것이 도리인데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총질을 해 주민들을 놀라게 해서야 되겠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그 노인은 "난 돈이 많아 10전으로 1전을 쏘았다고 해서 재산이 축나지 않는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해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인데 집터로 300~500평만 팔아주면 이곳에 정착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후가 온화하긴 하지만 음료수 얻기가 불편해 정착하기에는 좋지 않다고 말했더니 노인은 자기 혼자서 수도를 가설하겠다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김용찬씨는 부친 김성건씨에게 노인의 명함을 전하면서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했다. 명함에 적힌 이름은 〈中原太郞〉, 그는 하와이에서 번 많은 돈으로 제주도에 투자하려는 일본인이었다.

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한림, 대정, 서귀면에서 경쟁을 벌일 때였다. 그런데 中原이 스스로 신효리에 정착하겠다고 하니 절호의 기회였다.


구장은 그 날 밤 中原이 투숙한 서귀포의 여관으로 찾아가 수도 가설 문제를 의논했다. 마침내 〈中原이 신효에 정착하고 수도를 가설해 신효리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한다. 물 사용료는 1년에 한 가구당 40전으로 한다.〉는 데 잠정 합의했다. (당시 부녀자가 하루 김매는 삯이 20전이었다.)


이에 구장은 마을총회를 열어 中原과 합의한 내용을 놓고 주민들과 의논했다. 주민 모두가 수도가설을 대찬성하였다. 이에 구장은 일본 大阪에 거주하는 신효리 청년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띄워 이런 사실을 알렸다.(당시 대판에는 신효 출신 청년들의 모임인 〈경신회〉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청년들이 보내온 의견은 반대였다. 당시에는 배일사상이 많기도 했지만 이유인 즉, 일본인들이 겉으로는 매우 순하고 착하게 보이나 속에는 능구렁이가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 마을에 정착하게 되면 야금야금 마을을 삼켜 버려 결국엔 우리가 쫓겨나게 되니 한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향회가 소집됐으나 주민들의 의견은 일본인을 정착시키고 수도가설을 하자는 쪽이었다. 난처해진 김성건씨는 다시 대판으로 편지를 띄워 고향 주민들은 원하고 대판 거주 청년들은 반대하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대판에서 온 답신에는 대판에서도 모금을 할 테니 고향에서 모금을 주선하라는 것이었다. 마을 주민과 대판 거주 청년들이 합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수도를 가설하자는 안이었다. 수도 가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추진되었다.


1927년 여름 마침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일본인 기사 谷田部犧之가 여름 휴가로 서귀포에 와 있을 때 김성범 구장이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수도 설계를 부탁하니 일본인 기사는 쾌히 승낙하면서 무료로 설계를 해 주었다.

또 철관 규격은 경비가 적게 드는 2.5인치로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런데 막대한 경비를 신효리만의 힘으로 조달하기 어려워 하효리와 토평리에 연락을 하니 양리에서도 자체회의를 통해 동참하기로 결의했다.


마침내 구장을 비롯한 유지들이 모금한 결과 각리에서 2백원씩, 3개리에서 6백원이 모였고, 서귀면장 김찬익을 찾아가 부탁하니 면장 명의로 6백원을 지원해 줬다. 이 돈으로 공탁을 하고 서류를 구비해 전라남도에 신효리 명의로 허가 신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수도 공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타지에 거주하는 한 지주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방해공작을 한 것이었다. 그 지주는 행정기관까지 찾아가 수도허가를 내주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놓았다. 그 결과 제출된 서류가 타당한 이유도 없이 만 4년 동안 처리되지 못하였다.


1931년 전라남도 내무과장이 제주도를 초도순시한다는 정보에 접한 신효리민들은 구장을 비롯한 마을 유지들이 내무과장이 신효리를 지날 때를 기다렸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또 마침 가뭄철에 썩어가는 물을 내무과장의 코 끝에 들이밀며 "이런 물을 먹어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결국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31년 12월 18일부로 허가가 나왔다.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고 12월 27일 돼지 잡고 떡을 만들어 착공기념식을 가졌다.


당시에는 대공황으로 물건이 있어도 팔지를 못하여 기업들이 쓰러져갈 때라 수도관을 구입하러 일본 대판에 갔더니 여러 공장에서 자기네 물건을 사라고 로비가 대단하였다. 따라서 구매자의 요구대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도 녹이 잘 슬지 않는 품질 좋은 것을 고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32년 8월 마침내 상수도가설준공식이 거행되었다.(1996 『新孝마을』 58~60쪽)
1960년대 통계를 보면 돈내코 물의 용출량은 1일 700톤 정도였으며 그 중 675톤을 10,333명에게 공급한 것으로 나와 있다.(블로그 제주 물 이야기)


돈내코수원지에는 수도가설기념비가 있다.(현장미확인) 비문은 다음과 같다.


水道記念
期成會長 金錫勳, 後援面長 金贊益, 新孝區長 金成乾, 下孝區長 吳斗石, 吐坪區長 吳大振, 仝 吳玟寬, 工事設計監督 谷田部犧之, 三里水道水源地. 昭和六年十二月十八日 許可, 二七日 起工, 七年七月三十日 竣工. 工事監督 新孝 金泰珍, 下孝 玄奎元, 仝 梁龍禧. 吐坪 吳達熙 刻書

돈내코계곡에는 원앙폭포 아래, 그 위로 약 300m씩 떨어진 곳에 당시 설치한 취수조 3곳과 수도관 등이 남아 있다.

취수조는 시멘트로 만들었는데 대체로 180㎝ 220㎝ 120㎝ 규모의 직육면체 모양이며 아래쪽 구석으로 수도관을 연결하였고, 위쪽 구석에는 사각형 철제 뚜껑이 있었다. 수도관은 잠금장치 부분에서 끊어져 있고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다.


각 취수조 주변에는 용천수가 나오고 있으나 각 취수조 속에는 모래가 잔뜩 쌓여 있어서 취수조 속으로는 거의 물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설치 당시에는 용천수가 바로 취수조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수도관은 내 가운데를 통과하는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은 내의 서쪽 동산 경사면에 노출된 상태로 설치했었다. 내(川) 가운데 구간의 수도관은 곳곳이 찌그러지거나 잘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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