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월라봉 큰머리는 '신두형'..신효동 이윤묘(큰머리큰산,큰비석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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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월라봉 큰머리는 '신두형'..신효동 이윤묘(큰머리큰산,큰비석큰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6.1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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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의 주인공 이윤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제주입도조가 된다.

신효동 이윤묘(큰머리큰산,큰비석큰산)

 

위치 ; 신효동 19-4번지. 월라봉 남쪽 절벽 위. 감귤박물관 야외무대 남쪽 100여m 지점
유형 ; 묘
시대 ; 조선

 

신효동_큰산옛비석.

 

신효동_큰산 전경

 

 


월라봉 큰머리 큰산이 있는 곳을 올라가면, 북쪽으로는 한라산, 남쪽으로는 태평양, 동쪽과 서쪽으로는 산남일대가 시원스럽게 내다 보이고 다시 동쪽을 보면 큰내가 신효와 하효를 껴안고, 산세 좋은 곳임을 직감케 하는 봉우리에 "朝鮮國訓練院判官 李火允之墓"라고 쓰여진 "큰비석큰산"이 있다.


조선시대 아라동에 살던 이훈장부친이 돌아갔을 때의 일로, 이훈장은 부친을 모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궁리하던 중, 산터를 잘보고 풍수지리에 능한 명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의논케 하였다.

명인은 정의 고을에 효돈이라는 마을에 월라봉이 있는데 그 곳에 천리(묘를 옮김, 移葬) 터가 있으니 한번 가 보시라고 말한다. 훈장은 명인을 말에 태우고 함께 월라봉으로 와서는 묘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월라봉 큰머리는 "신두형"이라 하여 몇 년에 한번씩 남쪽벽이 떨어질 때마다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고, 앞에서는 용이 재주를 부리고, 삼도의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어 문장가가 태어나 자손대대로 번창할 산터라 하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이훈장은 비록 일이 어렵게 되긴 하였지만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끝내는 장사를 치루었다.


당시에는 초상집 곡소리가 십리밖까지 들려야 된다 하여 제주에서 목소리 좋은 여인들은 모두 동원하여 울게 했다는 말도 전해 오고 있다.

남정네들은 말도 못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상여도 메야지, 한라산 중허리를 생작으로 길을 내, 아라동에서 월라봉까지 오려고 하니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고, 또한 수십명으로는 엄두도 못낼 일이니 백명 넘게 동원을 했을 것이다.

이훈장이 부친 장례를 치를 당시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훈장댁이 세력이 좋고 재력좋은 집이라 훈장댁을 돕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또한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이 묘의 주인공 이윤은 경주이씨 국당공파 제주입도조가 된다.


월라봉-큰머리-큰산에 관한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였으며, 죽은이의 묘터가 후손의 성패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선조들의 믿음이 빚어 낸 일화이다.(1996 신효마을지)

이윤의 할아버지는 간옹 이익이다. 유배생활 중 김만일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인제를 낳았다. 인제는 윤을 낳았으나 묘가 제주에 있다는 기록이 없어서 신효마을지에서는 이윤을 입도조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이익을 입도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면적이 22m×75m(500평) 정도로 매우 넓은 반듯한 장방형으로 폭 120㎝ 높이 100㎝ 정도의 산담을 둘렀다. 앞(남)에는 李윤(火允)의 묘가 있고 뒤(북)에는 부인 淑人高氏의 묘가 있다. 봉분이 보통 무덤의 3배 정도 된다.


옛비석은'朝鮮國訓練院'부분만 남고 나머지는 풍화마멸되었고 옆이나 뒷면에는 글씨가 마멸되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원래 비석은 글자를 전혀 알아볼 수 없지만 원비문은 다음과 같다.


慶州之李稱東方大姓世襲冠冕有司憲府掌令諱瀷當光海時著直節安置濟州生子曰仁濟卽君之父也君諱(火允)字汝明以崇禎後庚寅歲之八月二十八日生少習弓馬年三十一而登武科遊京師旣而不樂也遂歸于濟服事節制營爲哨官歷把摠千摠爲別將勤仕用例得勵節校
尉訓練判官職階間爲鎭堡助防將晩以假率行首病卒於戊子七月六日壽五十九娶高氏生二子重發重茂二女適金時雨梁以發葬于㫌義縣月羅山之向丙原與高氏同原異穴於乎君雖生長遐裔而以家世故頗知慕士大夫之風性又沈毅廉直其特身行事動必求義之所在未嘗或苟焉而已余先君子嘗謫于濟君首來候仍盡誠事之雖先君子其待君也殊厚凡五六年見濟人多矣而其言善人輒曰李(火允) 李(火允) 及余之謫來與之益深益詳君行事之懿及卒聽於輿人蓋自耆老有識至婦女童子皆曰李別將亡矣濟其無人矣其爲諸武士者則傾三邑相率奔走奠哭以禮於喪此又前所未或有之事其爲人所重可知余於是不特痛惜 君之亡益歎先君子不失於知人也顧余非敢不朽人者而重發請甚勤
且義有不可辭者略識君本末俾揭其墓以告于後云戊子十二月十三日光山金春澤述


( ) 안은 한 글자임.
경주이씨는 우리나라의 대성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이익(李瀷, 1607-1675)은 광해군(光海君) 때를 당하여 곧은 절개로 힘쓰다가 제주에 안치(安置)되어, 제주에서 아들을 낳아 인제(仁濟)라 하였는데 곧 군(君)의 아버지이다.

군(君)의 이름은 윤(火允 )이오. 자는 여명(汝明)이니, 숭정후경인(崇禎後庚寅)년 8월 28일 태어났다.

어려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나이 31에 무과(武科)에 올라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나중에는 즐겨하지 않아 드디어 제주로 돌아와 절제영(節制營)에 복무를 하며 초관(哨官)이 되어 파총(把摠)과 천총(千摠)을 지냈으며, 별장(別將)으로 근무를 하였다.

벼슬에 임용되어서는 절제영(節制營)의 교위(校尉)와 훈련판관(訓練判官)의 직품을 하는 사이 의례히 격려를 받았다.


진보(鎭堡)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만년에 임시 행수(行首)들을 이끌다가 무자(戊子)7월 6일 병으로 돌아가니 나이 59세였다. 고씨(高氏)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 중발(重發), 중무(重茂)을 낳았고, 두 딸은 김시우(金時雨)와 양이발(梁以發)에게 시집갔다.

정의현(旌義縣) 월라산(月羅山)의 병원(丙原)의 향으로 묻혔는데, 고씨(高氏)와는 같은 언덕이나 혈(穴)이 다르다.


아아! 군(君)은 비록 먼 후예로 생장했지만, 집안 전통 때문에 자못 상대부(上大夫)들의 풍모를 모범으로 할 줄을 알아, 성품 또한 침착하고 굳세며, 청렴하고 곧았다. 그 특성을 몸소 행하고 일을 밝힘에는 반드시 의로움이 있는가를 추구하여 일찍이 혹시라도 구차해 한 적이 없었다.


나의 돌아가신 부친(父親)이 일찍이 제주에 유배를 왔는데 군(君)이 제일 먼저 와서 문안을 드리고 나서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비록 돌아가신 부친은 그 군(君)을 대함이 아주 두터워, 무릇 5, 6년을 제주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그분의 말이 착한 사람은 곧 이윤(李火允)이더라고 말하였다.

이윤(李火允)은 내가 유배 오게되면서 더불어 더욱 깊어지고 더욱 익숙해졌고, 군(君)은 아름다운 행실로 섬겼다.

돌아가게 되어서는 뭇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서, 거의 늙은 노인과 유식한 사람으로부터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말하기를, 이별장(李別將)이 죽었으니 제주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을 것이며, 아마 무인(武人)이나 선비된 사람이라면 경모할 것이라고 하였다.

삼읍(三邑)에서 서로 인솔하고 달려와서 술잔을 드리고 곡(哭)을 하며 상(喪)에 예를 하였다. 이것 또한 전에 있어본 적이 없던 일이니, 그 사람됨이 소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보다 다만 매우 애석해 할뿐만 아니라 군(君)의 죽음을 더욱 한탄하고 있다. 돌아가신 부친의 지인(知人)이었던 사람에 대해서 신의를 저버릴 수도 없고, 내가 영원히 살 사람도 아님을 돌아보아, 중발(重發)이 너무 열심히 요청하고 또한 의리상 사양할 수 없는 것이기에, 대략 군(君)의 본말(本末)을 아는 것을 그의 묘에 게재하도록 하여 뒷사람들이 말하게끔 알리노라. 무자(戊子) 12월 13일 광산(光山) 김춘택(金春澤) 지음 <김익수역>

광무후재병인(1986)에 옆에 새 비석을 세웠다. 새 비석에는 경주이씨 이익(李瀷)이 광해군 시절에 제주에 안치되었으며 그 손자가 이 묘에 묻혔음이 나타나 있다.

이윤은 숭정후경인년(1650) 8월생이며 훈련원 판관, 조방장 등의 벼슬에 있었고 무자년(1708) 7월 59세로 사망하였다. 비문은 양중해 선생이 썼다.

이익 ; 1579~1624. 호는 艮翁. 본관은 慶州. 161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진되었다. 그 뒤 사서, 정언, 헌납, 지평, 장령, 예조정랑을 거쳐 직강을 역임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내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다시 사예와 장령에 임용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위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한(典翰)에 추증되었다.(http://people.aks.ac.kr 인물상세정보) 제주에서는 김진용, 고홍진 등의 제자를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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