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정비장(鄭卑將)과 애랑의 이별의 현장.. 화북1동 화북포구(별도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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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정비장(鄭卑將)과 애랑의 이별의 현장.. 화북1동 화북포구(별도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06.23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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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도 매립공사가 진행되어 금돈지물 일대가 매립되었다.

화북1동 화북포구(별도포구)
 

위치 ; 제주시 화북1동 화북진 북쪽 바닷가
유형 ; 포구(교통, 어로시설)
시대 ; 조선

 

 


원래의 별도(화북)포구는 금돈지와 엉물머릿개를 두고 이른 말이다. 화북촌(禾北村)의 포구는 연디밋코지와 남당머리콪 사이 후미진 곳에 있다.

썰물 때 모습을 드러내는 ‘지방여’ 와 ‘톤여(여)’는 어느 정도 북풍을 막아 준다. 그 안에 두 개의 포구가 있다. 서쪽의 것을 ‘금돈지’ 또는 ‘새성창’이라고 하고, 동쪽의 것을 ‘엉물머릿개’ 또는 ‘묵은성창’이라고 이른다.


‘금돈지’는 섯동네 어선들이 정박한다. 포구의 구조 때문에 샛바람이 일면 ‘금돈지’ 포구는 타격을 입는다. 별도포는 비교적 수심이 깊어 썰물 동안에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걸석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묵은성창


‘엉물머릿개’는 ‘연디밋코지’를 의지하여 만들었는데, ‘연디밋코지’는 바람을 막아 주는 구실을 한다. 서쪽에 있는 ‘금돈지’를 흔히 ‘새성창’이라고 한다. 이는 곧 본래의 화북포구라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동성창’이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동쪽에 위치한 포구라는 말이다.


지금의 ‘엉물머릿개’는 동마을 어선들이 이용한다. 포구의 수심이 얕아서 썰물 동안에는 바닥이 드러나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걸석 현상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엉물머릿개’에 배를 매어 두었다가 바닷물이 미처 빠지기 전에 미리 ‘금돈지’로 배를 내어 놓는다.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 별도포(別刀浦)를 화북포(禾北浦)라고 하면서, 고노포(高老浦)와 소흘포(所訖浦)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또 “옛날에는 후풍관(候風舘)이 있었다. 중간에 없어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별도포를 두고, “배를 대는 곳으로는 비록 조천애(朝天涯)에 미치지 못하나 한라산 정북(漢拏山 正北)에 있어 바로 육지로 드나드는 직로(直路)의 포구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육지는 지금의 한반도이다. 또 별도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륙 포구 중 그 하나였다.


김상헌(金尙憲)은 『남사록(南槎錄)』에서, 이 포구를 두고 별도포라고 하면서 그 당시 제주목에 속한 전선(戰船) 세 척과 함께 병선(兵船)도 감출 수 있는 포구라고 하였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에는 별도촌(別刀村)이 있고, 그 양쪽에 남당곶(南堂串)과 흑여(黑礖) 사이 후미진 곳에 별도포가 있다고 하였다. 별도포는 별도촌에 있는 포구라는 말이다. 남당곶은 지금의 ‘남당머리콪’, 그리고 흑여는 지금의 ‘새빌여’를 가리킨다.

그리고 별도(別刀)는 화북(禾北)의 다른 말일뿐, 지금의 제주시 화북동을 말한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화북포구는 조선시대말까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대표적 관문으로 외래문물의 유입과 교통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포구였다.


탐라지(耽羅志, 1653년 刊) 水戰所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水戰所 禾北浦 ; 有板屋戰船中部左部右部各一隻待變粮六石格軍一百八十名射砲八十七名 礁嶼險惡大風常多板屋船不但(?)運用難便□泊亦易□□若去其板屋如戚繼光福船之制則物力省而運用便格砲足矣 水兵補覽錄而藏之與水操式軍減而財叅省似可


‘화북포에 판옥전선이 중부․좌부․우부에 각각 1척씩 있다. 비상양곡이 6섬, 격군 180명, 포를 쏘는 사수 87명이다. 이곳은 바위들이 험악하고 태풍이 많아 판옥선의 운용이 용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박하는 것도 불안하니 옛날로부터 내려와 이루어진 제도를 비록 쉽게 계청하여 개혁하기가 어려우나, 만약 판옥을 철거하고 척계광복선과 같은 제도를 도입한다면 물질과 노력이 덜어지고 운용이 편하여 격군이 감축되어 사포가 족하리니 수병보람에 기록하고 간수하여 수조식과 아울러 참관함이 가할 것이다.’


새성창


당시 화북포는 목(牧)을 보호하는 수전소로 수전에 대비하여 전선이 항시 대기하였으며 아울러 화북포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였다. 한편 지금의 무기고와 같은 息波庫를 두어 무기를 보관하였으며 당시 도내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커서 화북수전소의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식파고에는 交子弓 45장, 長箭 45부, 片箭 75부, 環刀(還刀?) 9자루, 地字銃 3문, 玄字銃 6문, 宙字銃 10문, 勝字銃 8문, 화약 75근, 水鐵丸 9천개, 鐵甲 3부, 鐵冒 3부 등을 보관하였다.(화북 마을지 36~38쪽)


그런데 이 글에 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의문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성이 없는 상태였다가 서기1678년에 이르러서야 최관 목사에 의하여 최초로 성이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이원진이 성에 관한 기록을 누락했었고 최관 목사는 어떤 형태와 규모로든지 있었던 성을 확장 개축한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서쪽의 성문은 포구와 연결되어 있었다.


제주목사 김정(金亻政, 1735~1737 재임)은 현재 화북방파제를 있게 한 토목공사의 주인공이자 그 토목공사로 인해 화북포 후풍관에서 순직한 목민관이다. 당시 화북포는 제주목의 관문으로, 제주를 오가는 공사선(公私船)이 왕래하며 정박하는 곳인데,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항만이 불완전하여 풍랑이 일 때는 항내에서 파선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등 배를 부리는 데 불편함이 많았다.


김정이 화북포를 정비할 때 남긴 고유문(告由文)을 보면, 270여년 전 화북포구 방파제 정비공사를 한 연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이 화북포구는 섬의 목구멍이면서 배에게는 요긴한 나루이나 포구의 암석이 들쑥날쑥 솟아 있고, 큰 물결이 찧어대며 거센바람이 격렬하게 부딪쳐서, 옛날에 쌓았던 석보(石堡)가 무너져 내려 남아 있지 않습니다. 움직이다가 엎어짐을 당해도 사람들이 노력하여 수리하려고 아니하고, 오히려 하늘에 한탄하고 모두 바다에 원망을 하였습니다.”라고 당시 실정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는 영조13년(1737) 쌀 3백섬을 내어 만 명의 일꾼을 모아 선창을 축조하였다. 스스로 돌덩이를 들고 공사 인부들을 격려하니, 앞을 다투어 돌을 들면서 공사를 하니 한 달이 못되어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3읍 주민들이 동원된 이 포구확장공사는 화북포 외에도 건입포에서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직접 돌을 지고 나르며 공사를 독려하였다.

길이 210척, 너비 21척, 높이 13척으로 하니 배 출입이 편해졌다. 이 공사는 기록에 남아 있는 축항공사의 효시라고 할 만하다. 그 위에 영송정(迎送亭)을 지어 공사 선박 출입의 검문소로 하였다. 그러나 1702년 이형상 목사가 그린 탐라순력도 禾北城操에는 이미 방죽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면 김정 목사가 처음으로 성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화북포를 처음 공사할 때 고유문(禾北浦始役時告由文)


김정의 화북포구 始役時 고유문


〈하늘은 만물을 덮고, 땅은 만물을 싣고, 바다는 만물을 건네어 줍니다. 순(舜)임금의 기형과 우(禹)임금의 도끼, 황제(黃帝, 헌원軒轅)의 배처럼 재단하여 이루시고 보필하여 도우소서. 좌우간에 바람불어 날아가고 험난해서 막히며 파도쳐서 흔들거리는 것은 기운이 그렇게 시킨 것이요, 이치가 그러한 것이며, 형세가 본디 그러한 것이다. 진실로 후풍할 수 있고, 진실로 평안할 수 있고, 진실로 조심할 수 있다면 위기에 처해도 안전하고, 험난함을 당해도 편안하며, 요동침을 만나도 잔잔할 것입니다.


아! 옛날 탁라(托羅, 제주의 옛 이름)는 처음 탐진(耽津, 강진의 옛 이름)으로 항해하였으므로 탁托을 탐耽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부터 그 뒤로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 주(州)를 삼은 지 천여 년이 됩니다. 벼슬아치들이 왕래하고 공물 바치는 것이 끊이지 않으니, 무역을 했든 안했든 왕령王靈의 충만함과 넓은 바다의 덕과 배를 타는 공입니다.


돌아보건대, 이 화북 포구는 섬의 목구멍이면서 배에게는 요긴한 나루이나 포구의 암석이 들쑥날쑥 솟아있고, 큰 물결이 찧어대며 거센 바람이 격렬하게 부딪쳐서, 옛날에 쌓았던 석보(石堡)가 무너져 내려 남아 있지 않습니다. 움직이다가 엎어짐을 당해도 사람들이 노력하여 수리하려고 아니하고, 오히려 하늘에 한탄하고 모두 바다에 원망하였습니다.


옛날에 막았던 것을 복구하기로 생각하고 공장(工匠)들을 소집하여 돌을 깨고 돌을 운반하면서, 삼가 희생과 술을 차리고 정성을 다하여 말씀드리며 일에 앞서 고유(告由)하오니, 바람과 태양이 화창하고 따뜻하도록 거령(巨靈)께서 도와 순조롭게 하시고 조두(潮頭, 조수가 드나드는 방파제의 끝)를 조금 안정시키시어 하루 이틀 층층이 쌓아 완성하여 백세(百世)를 지탱할 수 있게 하소서.


배를 감출 수 있고 배를 띄울 수 있으며 배를 들여놓을 수 있는 것에 하늘이 이루지 않음이 없고 음덕이 돕지 않음이 없으며 신이 돕지 않음이 없나이다.〉


김정선생의 가장(家狀) 중에는 화북포구 공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주의 화북포(禾北浦)는 바로 공사선(公私船)이 왕래하며 정박하는 곳인데 포구(浦口)가 비좁아서 밀물이 크게 치면 배를 감추기에 불편하고 가라앉는 일이 항상 많았다. 부군(府君)은 제번미(除番米, 번을 면제하여 대신 받은 쌀) 3백섬을 내어 거의 만명의 역부(役夫)를 모집할 수 있어서 선창(船倉)을 크게 쌓았다.

길이가 1백20여 보(步), 너비가 10여 보, 높이가 6보였다. 친히 스스로 손으로 돌덩이를 드는 일까지 감독을 하자, 막비(幕裨) 이하도 앞 다투어 돌을 들면서 한 달이 못 되게 공사를 하니 마쳤다고 알려왔다. 쌓아 놓은 것이 아주 단단하고 완전하여 이 때부터 배들이 안심하여 정박하게 되어 공사(公私) 간에 덕을 입었다.”(“화북포구에서 제주성(城)안까지 옛 길을 걷다” 안내 자료)


화북포를 다시 공사할 때의 기청문(禾北浦再役詩祈晴文)


〈바다 가운데 쌓는 공사를 그럭저럭 완료하였으나, 사람의 공력을 다하지 못하여 아쉬워하고 있는데, 쌓아 놓은 돌이 밤중에 저절로 무너져 버리니, 이는 신의 위엄을 보이신 것은 아니라고 하나 한쪽 벽은 온전한데 긴 제방 바깥은 잘려나갔습니다.

돌아보건대, 전에 공들인 것이 아까워 다시 오늘 거듭 고치려하나 잠시 비가 내리다가 언뜻 바람이 불어오니, 일기가 불리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만 곧 시작했다가 곧 중단하곤 하니 일꾼들의 헛된 공력만 한탄하옵니다.

이에 거짓없는 마음을 다하여 감히 푸른 하늘에 기원하오니, 급히 풍백風伯을 거두시고, 또한 우사雨師를 그치게 하시어, 모두 맑고 화창함을 기뻐하고 수많은 인부들로 하여금 스스로 힘을 내어 더욱 단단히 하도록 하여 백세(百世)를 기약하며 길이 남아 있게 하소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各浦古有監考今廢只朝天浦和北浦有監考又梁直譏察浦口出入之人〉(각 포구에는 옛날에 감고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다만 조천포와 화북포에는 감고가 있다. 또 양직이 있엇 포구를 드나드는 사람을 살피기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감고는 ①조선시대에 정부의 재정 부서에서 전곡(錢穀)의 출납 실무를 맡거나 지방의 세금 및 공물의 징수를 담당하던 벼슬아치 ②국가에서 특수용도로 관리하던 산림, 내, 못을 감독하던 사람 ③조선 후기에 봉수의 철저한 관리를 위하여 각 노선을 순회하면서 감시 감독하던 벼슬아치를 말한다.


양직은 나루터지기를 말한다. 梁은 다리 방죽 등 출입할 수 있는 곳을 말하는데 제주어로 한다면 출입구를 뜻하는 ‘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양직은 배와 관련지으면 배가 출입하는 포구를 지키는 사람 곧 포구지기인 셈이다.(기억 속의 제주 포구)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南宦博物, 1704) 관방조에는 화북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禾北浦 ; 달리 別刀라고도 한다. 예전에 水戰所가 있었는데, 지금은 戰船을 없앴다. 제주성 동쪽 10리에 있다. 숙종 4년(1678) 戊午에 목사 崔寬이 설치하였다.

성 둘레가 608자, 높이가 10자이다. 동문과 서문이 있고, 문 위에 譙樓가 있다. 城丁軍 159명, 雉摠 2명, 助防將 1인-城將을 겸하는데 각 鎭이 동일하다-이다.

성 안에 물이 없다. 성서쪽 10보쯤에 仁水泉이 있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맛이 짜다. 옛날에는 바람을 기다릴 때 모두 朝天을 거쳤으나, 지금은 이 진에서 바람을 기다린다.

제주성에 가까운 곳인데다 드나들기가 편하고 쉬우므로 營牧 및 오가는 別星(중앙정부에서 특별히 지방에 파견하는 大小관원을 두루 일컫는 말)이 다 이 포구를 거친다. 喚風亭과 迎送亭이 있다.(“화북포구에서 제주성(城)안까지 옛 길을 걷다” 안내 자료)


이증은 ‘남사일록’(1679년 12월 초7일)에서 화북포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성안에는 해가 져서 캄캄하여 주성(州城)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해 그대로 잤다. 밤에 눈보라가 크게 쳤다. 화북(禾北)은 제주의 동쪽 10리에 있고 옛날부터 배가 머무는 곳이다. 일찍이 무오(戊午‧1694년을 일컬음)에 윤창형이 목사였을 때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다. 성첩(城堞) 둘레가 겨우 2리(里)이고, 동 서의 두 문이 있는데, 문 위에모두 초루(譙樓)를 설치하였고, 포구는 돌방죽을 맞쌓아 선창(船倉) 및 배를 감추는 곳으로 삼았다. 주(州)에 거주하는 조방장이라 칭하는 한 사람과 여수(旅帥) 한 사람이 군사를 이끌고 방수(防守)를 한다.”(“화북포구에서 제주성(城)안까지 옛 길을 걷다” 안내 자료)


남사일록에는 화북포에 대해서 ‘舊有候風館 中廢’(옛날에는 후풍관이 있었는데 중간에 없어졌다.) ‘船泊處雖不及朝天涯而在漢拏之北正是陸地入來直路浦’(배를 대는 곳으로는 조천애에 미치지 못하나 한라산 정북에 있어 바로 육지로 드나드는 직로의 포구다)라고 했다.(고광민, 제주도 포구 연구. 57쪽) 화북포는 어등포, 조천포, 조공천, 애월포 등과 더불어 5개의 연륙포구 중 하나였다.


화북포는 여러 포구 가운데 제주성(城)과 가까운 포구로, 17세기 내려진 출륙금지령 등으로 이용자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건입동 산지항이 축조되기 전에는 화북포구는 전남 강진과 영암, 해남 등과 제주를 잇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했다.

이 포구를 통해 쌀과 소금 등 생활필수품이 들어왔으며, 관리들과 유배인도 들어왔다. 1641년 8월 5일부터 8월 19일까지 광해군의 시체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화북포구에서 제주성(城)안까지 옛 길을 걷다” 안내 자료)

화북포구가 유배인을 제주목에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들어온 유배인이 많다. 서재 임징하,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 유배인들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유배와 관련된 기사 5860건을 발췌, 분석을 해본 결과 빈도수가 많은 유배지가 대략 40여 개가 있으며 이들 가운데 1위에서 5위까지는 모두 섬이며 1위가 바로 제주도다.

이렇게 유배지로 제주도가 각광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인데다 관방(關防)이 설치되어 죄인에 대한 관의 통제가 가능했던 점과 경제적인 여건이 유배인의 생활을 책임질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죄인이 유배지에 보내지면 유배지의 백성들이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유배인들이 제주도에 집중되다 보니 범죄의 가능성뿐만이 아니라 주민들을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 제주도에 유배인들이 많이 몰리자 도적이 성행하고 그로 인하여 말을 기르기가 힘들 정도라고 하면서 “죄인들을 육지로 출배(出配) 시켜달라”고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주도는 해로가 무려 9백리로 중죄대벌(重罪大罰)이 아니면 굳이 유배되지 않는다.

조야가 모두 파도 때문에 이곳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제주목에 유배시키는 죄인을 실은 배가 표류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전라도 관찰사나 제주목사의 보고가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제주일보 110215 양진건 글)


이처럼 화북포구는 제주를 오가는 이들에게 많은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애환이 서린 포구였으며 역사의 현장이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배비장전(裵卑將傳)’의 도입부인 정비장(鄭卑將)과 제주기생 애랑이 이별의 정회를 나누던 문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포구 서쪽에는 바다 용왕신을 모시는 해신사(海神祠)가 있는데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할 때면 제를 올려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곳이다.(잊혀져가는 문화유적) 화북방파제는 그 후 여러 차례 정비되어, 오늘날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2013년에도 매립공사가 진행되어 금돈지물 일대가 매립되었다.
《작성 091007, 보완 130311, 1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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